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0회>
독재자는 국민의 분열을 먹고 산다. 민족/반민족, 혁명/반동, 무산계급/유산계급, 친일/반일, 반제(反帝)/친제 등의 비천한 2분법을 들이밀고서 개개인에 한쪽 진영의 선택을 강요한다. 강압 속에서 사람들이 한 쪽으로 쏠리면, 독재자는 재빨리 ‘다수’를 선점하고 ‘국민’을 참칭한다. 공동체를 양분하는 ‘갈라치기,’ 자기편을 전체 국민으로 둔갑시키는 ‘바꿔치기’야 말로 판에 박힌 독재자의 야바위 놀음이다.
실제로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대부분 정치범죄는 “다수 국민의 의지”를 내세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다수지배(majoritarian rule)의 결과였다.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만(Michael Mann, 1942- )의 분석에 따르면, 히틀러의 제3제국, 스탈린의 “대공포,”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폴 포트의 킬링필드,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등 20세기 전체주의 정권의 정치범죄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종족이 전체 국민(인민, people)을 사칭한 후 소수를 비(非)국민(비인민, non-people)으로 몰아서 제거했던 “민주주의의 어둠”이었다.
마오 “인민민주독재는 반동파의 발언권을 박탈하는 것”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석 달 앞둔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28주년 기념식에서 “인민민주독재를 논함”을 발표했다. 그는 “인민민주독재”를 반동파의 발언권을 박탈하고 오직 인민에게만 발언권을 갖게 하는 것”이라 정의한 후, 다음과 같이 논의를 이어갔다.
인민이 누구인가? 중국의 현 단계에선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도시 소자산계급 및 민족 자산계급이다. 이러한 계급이 노동자계급과 공산당의 영도 아래 단결하여 자기의 국가를 이루고, 자신들의 정부를 선출한다. 자산계급의 주구인 지주계급, 관료자산계급 및 그러한 계급을 대표하는 국민당 반동파와 그 부역자들에 대해선 전정(專政)을 실시하고, 독재를 실행한다. 그런 자들을 압박하고 규율로 묶고, 그들의 망언망동을 금지시켜야 한다. 그들이 망언을 하고 망동을 부리면 즉각 체포하여 제재를 가해야 한다. 인민의 내부에 대해선 민주제도를 실행한다. 인민은 언론, 집회, 결사 등의 자유권을 갖는다. 인민에겐 선거권이 부여되지만, 반동파엔 어림없다. 인민 내부에 대한 민주 방식과 반동파에 대한 전정 방식이 상호적으로 결합된 양면의 제도가 바로 인민민주독재다.
그가 제창한 “인민민주독재”는 오늘날 중국 헌법 서언(序言, 전문)과 총강 제1조에 명시된 최고의 통치 원칙이다. 인민민주독재의 실행을 위해선 사람들을 인민과 적인(敵人, 인민의 적)으로 양분하는 ‘갈라치기’가 급선무다. 마오쩌둥은 다수 인민이 소수의 반동분자를 제압하는 인민의 독재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 굳게 믿었다. 소수자 인권보호, 다수폭력의 방지, 법 앞의 평등, 자력구제 금지 등 입헌주의의 기본 원칙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틈만 나면 사회주의 혁명을 저해하는 소수의 반동파를 색출해서 제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령 문혁 개시 4년 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가 없인, 군중을 발동시키지 않고선, 군중의 감독이 없다면, 반동분자 및 나쁜 무리에 대한 효과적인 독재를 할 수 없다. 그들을 효과적으로 개조할 수도 없다. 그들은 계속 소란을 피울 수 있으며, 심지어는 부활을 꾀할 수도 있다.”(1962.1.30. “확대 중앙공작 회의 강화”)
돌이켜 보면, 문화혁명의 전 과정이 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반동파를 제압하는 군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역사였다. 문혁 초기엔 군중이 직접 나서서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세력을 때려잡는 군중 반란의 과정이었다. 1968년 중순 이후부턴 군대가 이끄는 ‘혁명위원회’가 인민민주독재의 이름으로 가상의 반동분자들을 색출하는 마녀사냥의 광기가 이어졌다. 그중 가장 잔혹한 사례가 바로 “청리계급대오운동(1968-1976)”이었다.
마녀 사냥의 광기...’청리 계급대오 운동'
1968년 문혁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마오쩌둥은 질서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벌써 1년 넘게 중국 전역에선 군사적으로 무장한 군중 조직들이 서로 맞붙어 전투를 벌이는 실제적인 내전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어려운 특수상황에선 비상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67년 여름 이후 무장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비상조치가 필요한 특수상황이었다.
1968년 6월 3일, 6월 24일 중공중앙은 전국의 모든 군중 조직에 무장투쟁을 즉각 중단하라 명령했다. 아울러 지방의 군부에 폭도 진압의 전권을 이양했다. 군부는 일제히 무력을 동원해서 지방의 무장집단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유혈 진압의 포화 속에서 1968년 9월 신장을 마지막으로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건립됐다.
마오쩌둥은 혁명위원회를 통해서 인민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가상의 적을 깡그리 소탕하는 정치 캠페인을 개시했다. 1967년 말 상하이에서 개시된 “청리계급대오(淸理階級隊伍, 이하 청계)” 운동은 1968년 5월중공중앙의 공식 명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청리계급대오”란 문자 그대로 무산계급의 조직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한다는 의미다. 운동의 명분은 문화혁명의 혼란을 틈타 관·정·군·민 전 기관에 잠입한 내부의 반동파를 색출해서 “투쟁하고, 비판하고, 개조하는” 전면적인 조직 정비의 목표를 표방했다. 여기서 반동파란 구체적으로 반역자, 특무 간첩, 자산계급, 국민당 잔당, 주자파 및 흑오류(黑五類) 등을 이른다. 이들을 때려잡는 “청계 운동”의 전권은 지방에 속속 들어선 혁명위원회에 부여됐다.
어찌 보면 1940년대 이래 마오쩌둥이 줄곧 써온 정풍(整風)운동과도 유사했다. 다만 문혁의 와중에서 전국에 새롭게 건립된 ‘혁명위원회’에 전권을 부여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혁명위원회는 명목상 인민해방군, 혁명 간부 및 혁명 군중 등 관·정·민의 3결합을 지향했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은 지방 군부가 장악했다. 혁명위원회가 떠맡은 “청계 운동”은 문화혁명의 전 과정에서 최장 기간 최대 규모로 지속되면서 최다 희생자를 낳은 가장 가혹한 정치 캠페인으로 기록됐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3천만 명 이상이 붙잡혀서 문책을 당하고, 50만 명 이상이 조직적 고문, 자백 강요, 인민재판, 강제 자살, 집단학살 등의 이유로 비자연적 죽음에 내몰렸다. 희생자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청계 운동”의 직간접 피해자의 규모는 대략 1억 명, 곧 전 인구의 8분의 1에 달했다.
5개월 사이 1만8000명 반혁명으로 몰아 학살
1968년 1월 1일에서 5월 11일까지 광시성(廣西)에선 1만 8천 명이 반혁명 조직원들로 몰려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마녀사냥의 광열은 곧 장시(江西), 랴오닝(遼寧), 헤이룽장(黑龍江), 산시(山西), 장쑤(江蘇)성으로 번졌다. 중국 2천 개 현(縣)에선 평균 100명 이상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캉성(康生)과 장칭(江靑) 등의 명령에 따라 1968년 1월부터 1969년까지 네이멍구자치구에서는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34만6000명(그중 75%가 몽고족)이 기소되어 1만6332명이 사망하고 8만7180명이 회복불능의 불구가 되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70만 명이 누명을 쓰고, 4만 명이 사망하고, 14만 명이 불구가 됐다.
같은 시기, 허베이(河北)성에서도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국민당 잔당이 존재한다는 천보다(陳伯達)의 주장이 도화선이었다. 그 결과 8만4000명이 체포되어 가혹행위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2955명이 죽고, 763명이 불구가 됐다. 윈난(雲南)성에서는 138만 명이 누명을 쓰고 가혹하게 심문당하다가 1만7000명이 죽고, 6만1000명이 불구가 됐다. 1968년 4월 30일, 광시성 군구의 9개 중대가 인근 닝밍(寧明)현의 군중조직을 공격해서 108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지방에서 시작된 “청계 운동”의 광열은 1968년 5월에 이르면 대도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5월 상하이에선 16만9405명이 억울하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고, 그 과정의 가혹행위로 5449명이 타살당하거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말았다.
숨어 있는 가상의 반동파를 색출해 처형하는 “청계 운동”은 초기 단계부터 과격하고도 가혹한 양상을 보였다. 억울한 희생자가 수도 없이 속출했음에도 마오쩌둥의 결심은 추호도 흔들림 없었다. 1968년 5월 25일 중공중앙은 전국 조직망을 통해서 “청계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명령하는 마오쩌둥의 비시(批示)를 하달했다. 중앙당의 공식적 지원 아래서 전개된 지방의 “청계 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집단학살의 활화산으로 타올랐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참혹한 “청계 운동”의 실상을 파헤쳐 보자.
돌이켜보면, 마오쩌둥 방식 인민민주독재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다수 인민이 민주적 합의를 통해 소수의 적인(敵人)을 독재적으로 감시하고 처형해야 한다고 혁명 군중을 부추겼다.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는 인민이 법 위에 군림하는 폭민정치(mobocracy)와 다르지 않다. 표면상 인민이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서 자발적으로 인민 주권을 행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독재정권이 군경을 동원해서 바로 그 인민을 감시하고 조정한다. 인민민주주의가 계급학살(classicide)과 인종청소(genocide)를 가능케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청계 운동의 사례가 증명하듯, 인민민주주의는 인민의 이름을 팔아 자행되는 인민독재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