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1회>
“죄의유경(罪疑惟輕).” “죄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으면 형벌을 가볍게 한다”는 의미다. <<상서(尙書)>><대우모(大禹謨)>장에서 명신(名臣) 고요(皐陶)가 순(舜)임금의 치덕을 기리며 남긴 말이다. 상고(上古) 시대의 통치자도 형벌 적용에선 최선의 신중함을 기했음을 강조하는 유가(儒家) 경전의 근거다.
근대 형법에 따르면, 어떤 피의자든 유죄 확정 이전엔 범죄자로 취급될 수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의 원칙”은 근대 형법의 3대 기둥이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그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문화혁명 당시 “무죄 추정의 원칙”은 완벽하게 폐기됐다. 대신 “유죄 단정의 폭력”이 자행됐다. 군중집단과 국가조직은 “인민의 적”을 모두 색출하는 마녀사냥, 인민재판, 집단테러를 이어갔다. 털끝만큼의 혐의만 있어도 군중집회에 불려나가 무방비로 조리돌림을 당해야만 했던 집단 린치의 시대였다. 그 모든 사태는 “군중독재”를 계급투쟁의 원칙으로 삼았던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최고 지시에서 비롯됐다.
“유죄 단정”의 테러...4만명 타도 위해 40만명 제거
지난 회(50회)에서 살펴봤듯, 청계 운동은 1967년 11월에서 1968년 4월까지 여러 성에서 시험적으로 실시됐다. 1968년 5월부터는 중공중앙의 공식적 선언과 함께 전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최소 3천 만이 구속돼서 심문을 받고, 50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족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무려 1억 명에 달했다. 여덟 명 중 한 명이 회복불능의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당해야만 했을까?
마오쩌둥의 다음 발언에 단서가 보인다. 청계 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 10월 5일 저녁 알바니아 사절단과의 대화에서 마오쩌둥은 말했다.
“이번에 당, 정, 관, 민 모두가 비교적 큰 규모로 깨끗이 정리됐소. 스스로 청산하고 정리하고, 스스로 폭로를 했죠. 7억 인구라면, 나쁜 자들이 1천 명 중 한 명이라 해도 ‘적아(敵我) 모순’은 엄중하오. 광둥성을 보면, 국민당 사병, 헌병, 경찰, 국민당 군관, 국민당 간부, 삼청단(三靑團, 국민당 청년조직), 일관도(一貫道, 금지된 민간종교) 등이 청산됐는데, 그 숫자는 약 40만 명쯤 되오. 광둥성 인구가 4천만이니까 40만이면 인구의 1프로요. 이 40만이 바로 국민당의 헌병, 경찰, 당원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다 악질분자는 아닐 테죠. 만약 악질분자가 1000의 1이라면 4천 만 중에서 4만 명에 달하오. 앞으로 반년, 혹은 1년 동안 청계 운동을 하면 10년에서 20년 정도 일시적 안녕을 도모할 수 있겠죠. 이번이 완전히 깨끗이 청소했다고 할 수도 없소.”
이른바 ‘적아모순’이란 타협 불가능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 사이의 모순을 이른다. 마오쩌둥은 외국의 사절단에게 광둥성에서 적아모순의 “악질분자” 4만 명을 타도하기 위해 40만을 깨끗이 정리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0.1%의 악질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1%를 숙청했다는 발언이다.
<<상서>>에 따르면, 순임금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따르지 않았다(與其殺不辜,寧失不經),” 순임금과는 정반대로 마오쩌둥은 설령 아홉 명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해도 단 한 명의 악질분자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계 운동은 바로 그러한 마오쩌둥의 계급투쟁의 논리에 따라 전개됐다. 하부 단위에선 투쟁 대상을 최대한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걸려들면, 혁명의 열정이 지나쳐서 저지른 “좌의 오류”라 변명할 수 있지만, 단 한 명이라도 놓치게 되면, 스스로 반혁명분자로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적을 고립시켜 최대로 맹렬히 타격하라”
청계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서 마오쩌둥은 다시금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을 이용했다. 야오원위안은 1965년 11월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을 공격해서 문혁의 뇌관에 불을 지폈던 바로 신예의 비평가였다. 문혁의 절정에서 야오원위안은 이미 4인방의 한 명으로 급성장해 있었다.
1968년 5월 13일, 야오원위안은 신화 인쇄공장의 대적 투쟁을 근거로 “청계운동 정책성 문제의 총결”을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곧 바로 야오의 문장을 극찬했다. 중공중앙은 5월 25일 공식적으로 전국망을 통해서 “신화 인쇄공장의 대적 투쟁”을 모범 사례라 발표했다. 중공중앙이 반포한 “중발 [68] 74호”는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베이징 신화(新華) 인쇄공장은 1910-20년대엔 북양(北洋) 군벌 시기 창설돼서 1930-40년대 일제 치하와 국민당 지배를 거쳐 갔다. 문혁 당시에는 상하이와 동북 지역의 여러 인쇄공장을 합병한 직원 3천 명의 큰 공장으로 확장돼 있었다.
1968년 2월 21일 중앙 경위단의 8341부대는 군관(軍管) 인원을 베이징 신화인쇄공장에 투입해서 5월까지 두 달 넘게 대적(對敵) 투쟁을 전개했다. 군관 인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 공장의 간부들 중에는 과거 국민당에 가입했다가 이후 공산당에 유입된 22명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맹렬한 계급투쟁”의 첫째 대상이었다.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다수의 군중을 “발동(發動)시켜” 소수의 계급 적인(敵人)을 공격하는 군중독재였다.
신화 인쇄공장에 투입된 군관인원은 50여 일에 걸쳐 군중을 발동시키는 계급투쟁의 전초전을 벌였다. 급기야 4월 11일, 4월 16일 신화 인쇄공장에서는 적대세력에 대한 투쟁대회가 개최됐다. 1968년 4월 11일 거행된 1차 대회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구금했다. 4월 16일 2차 대회는 마오주석을 모욕하고 문화혁명을 방해한 6명의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투쟁이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군관 인원은 청계운동의 기본원칙을 다음과 같이 도출했다. 첫째, 마오쩌둥의 훈시대로 ‘적아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엄격하게 구별할 것. 둘째, 투쟁의 큰 방향을 견고히 잡을 것. 셋째, 일체의 단결 가능한 사람들을 단결시킬 것. 넷째, 모든 적극적 방법을 다 동원할 것. 다섯째, 소수의 계급적인들을 최대한도로 고립시켜 맹렬히 타격할 것.
중공중앙의 명령에 따라 전국의 각 단위에선 신화 인쇄공장의 선례를 본받는 전면적 계급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청계 운동의 군중독재는 다수 군중이 소수의 계급 적인을 단죄하는 집단 린치의 과정이었다. 집회, 폭로, 비방, 구타, 감금, 고문, 자백 강요 등의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나?
문혁 중 ‘청계운동' 피해자 3000만명 추산하기도...대규모 국가 테러
현재 문혁 시기 전체 희생자의 숫자에 관해선 25만 명에서 1500만 명까지 다양한 연구가 발표돼 있다.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는 그만큼 논란거리다. 스탠포드 대학의 사회학자 앤드류 월더(Andrew G. Walder, 1953- )의 연구에 따르면, 2010년까지 출판된 2213개 중국 전역의 현지(縣志, 현 정부 백서)에 기록된 문혁 시기 사망자는 27만3000 명, 피해자 1340만 명이다. 사망자의 75% 이상, 피해자의 90% 이상이 정부기관에 의해 자행된 대민 테러였다. 물론 정부의 통계는 실상보다 훨씬 적은 숫자다.
현지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정한 결과, 월더는 1966년 6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4년 6개월의 시기 사망자의 총수를 88.7만-198만 명, 피해자의 총수는 3100만 정도로 추산한다. 그 중 90%가 1967년 말- 1968년 말, 1969년 말-1970년 초의 두 시기에 집중돼 있다. 청계 운동 과정의 사망자는 전체 사망자의 54.5%에 달하므로 대략 48만-108만 정도에 달한다.
재미 연구가 딩수(丁抒, 1944- )의 연구에 따르면,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각 현(縣) 평균 1만 명이 박해당하고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국적으로 추산하면 피해자는 3천 만, 사망자 50만에 달한다. 피해자의 총수에서 월더와 딩수의 연구는 3천 만 정도로 거의 일치한다. 딩수가 제시하는 청계운동의 사망자 수는 월더가 제시하는 최소 수치에 수렴한다.
월더는 청계 운동과 크메르 루즈 정권이 자행한 캄보디아 킬링필드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한다. 폴 포트는 전체 인민 속에 잠복하는 구시대의 불순분자를 모두 청리(淸理, 청소하고 정리)한다는 마오이즘(Maoism)의 영향 하에서 대학살을 감행했다.
명확한 증거도, 공정한 재판의 절차도 없이 가상의 계급적인을 색출해 제거하는 마오쩌둥 방식의 계급투쟁은 대규모의 국가 테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계급독재 인민재판 하에서 “무죄추정의 원칙” 대신 유죄 단정의 폭력이 자행됐기 때문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