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박근혜 정권의 중요한 유산 하나를 복권시켰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다. 문재인 대통령은 합의 2주년을 맞은 2017년 12월 28일 “국제사회의 보편 원칙에 위배되며 피해자 배제라는 중대한 흠이 있는 뼈아픈 합의”라고 선언하고, 피해자 지원 사업을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합의를 사실상 파기했다. 그런데 법원은 피해자의 소송을 기각하면서 이 합의가 “피해자 권리를 구제하는 정부의 유효한 외교적 보호권 행사”라고 판결했다. 국제사회의 보편 원칙에도 맞고,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가 배제되지도 않았으며, 피해자 상당수가 합의에 따른 구제 사업에 응했다고 했다. 대통령의 고의적 왜곡을 사법부가 온전히 바로잡았다. 문 정권 4년 외교를 결산하는 상징적 반전(反轉)이었다.

꿈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대화하고 있다. 남북이 벌인 이날 TV 이벤트는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와 삶은 소대가리 욕 폭탄으로 일단락됐다./한국공동사진기자단

서울 종로의 어느 한식집엔 일명 ‘아베 메뉴’가 있다. 메뉴판에 없는 비공식 메뉴다. 생선회, 꽃등심, 갈비, 한국산 맥주로 구성된다. 위안부 합의 두 달 전 한국에 온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 식당에 들러 먹은 음식이라고 한다. 아베 총리는 그날 오전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러고도 점심을 같이하지 못했다. 거절당한 것이다. 수행원은 있었지만 외교적 ‘혼밥'이었다. 푸짐하게 먹었지만 국가적 수모였다. 아베 총리와 동행해 서울에 온 일본 정부의 한 외교관을 그날 밤 만났다. 박 대통령이 오찬을 거부한 이유가 위안부 문제의 ‘연내(年內)’ 타결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냐는 질문에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전쟁 때도 장군이 협상하러 오면 밥은 먹여 보낸다. 나는 박 정권의 이런 대일(對日) 외교 방식이 너무 협량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실제로 해가 넘어가기 전에 협상이 타결됐고 12월 28일 합의가 발표됐다. “정신이 너덜거릴 정도로” 막후 협상 때 고생한 사람들 이야기를 몇 년 뒤 들었다. 다들 하는 얘기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점심 한 끼까지 반일(反日)을 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목표에 도달하자 동북아 안보의 한·미·일 삼각 공조를 구축했다.

박 정권에 비하면 문 정권의 반일은 놀이에 가깝다. 2018년 대법원이 징용 재판에서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정상적 정부라면 일본과 심각하게 협의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자국 국민의 대일 청구권 포기 조항에 서명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시간만 끌다가 일본이 경제를 건드리자 문 정권은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 죽창가, 토착 왜구, 이순신 12척 발언, 거북선 횟집 오찬…. 국민을 갈라치기 한 이런 저질 발언의 출산지는 소셜미디어가 아니다. 모두 대통령의 말, 청와대 핵심 참모의 글과 행동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지지율이 올랐다며 낄낄거렸을 것이다.

외교가에서 이런 얘기가 돈다. 청와대는 강창일 전 국회의원을 주일 대사에 내정한 뒤 “오래 쌓아온 고위급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경색된 관계의 실타래를 풀 것”이라고 했다. 강 대사의 학자 시절 일본 우익 연구는 대단했다. 하지만 학식이 있다고 대사가 되는 건 아니다. 강 대사는 10년 전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쿠릴열도를 방문해 일본의 ‘고위급 네트워크’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서울에 있는 일본인 특파원 한 명만 잡고 물어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실타래를 풀라”며 보냈다. 고차원적 반일인가? 정말 몰랐거나 그래도 통한다고 생각해서 보냈다는 게 외교가의 정설이다.

문 정권은 반일 몰이를 중단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돌변해서 외교관이 창피할 정도라고 한다. 대통령은 떠나는 주한 일본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덕담을 나눴다. 이례적이다. 그는 주미 대사로 이동했다. 외교가에선 미·일에 좋은 말을 해주길 기대한 듯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대법원의 징용 판결을 흔들 수 없는 금석처럼 여겼다. 그런 대통령이 피해자 손을 들어준 1월 위안부 판결에 대해선 “곤혹스럽다”고 했다. 외교가에선 다들 “도쿄올림픽에서 남북 평화 쇼를 하려고 저런다”고 한다. 일본도 의도를 뻔히 안다.

어게인 평창.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한국과 스위스의 경기에서 문재인 대통령, 바흐 IOC 위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왼쪽부터)이 나란히 앉아 응원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도쿄올림픽에서 이 장면이 다시 연출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스포츠조선

반일은 친북(親北)과 함께 문 정권 외교의 두 축이었다. 친북 노선은 작년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와 삶은 소대가리 발언으로 사실상 물 건너갔다. ‘친북’을 살려보겠다고 ‘반일’을 ‘친일’로 돌렸다. 역시 문 정권의 머리 꼭대기에 북한이 있다. 북한과 쇼를 할 수 있다면 달나라라도 가려나.

5월 10일이면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4년을 채운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과 같다. 이제 시간 탓은 안 된다. 문 대통령은 대일 외교에서 박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 이것이 첫 승패다. 그러면 경제는? 사회는? 정치는? 외교는? 안보는? 앞으로 문 정권은 그들이 대중을 선동해 적폐로 몰아낸 박 정권과 하나하나 비교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 4년의 명암도 정당하게 재평가돼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