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 4주년 기념행사는 기자회견이라 하기도 민망하고, “임기 1년이 남았습니다”라는 첫머리 첫 문장 말고는 모든 항목이 진위(眞僞) 논란에 휩싸여 자축(自祝) 연설이라 부르기도 구차스러웠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자화자찬(自畵自讚)으로 흐르기 십상이라지만 정도가 심했다. ‘대통령이 업무를 적절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70% 국민을 향해 “당신들 잘못 판단했다”고 반박하고 싶었던 듯하다.

10일 문재인대통령이 취임 4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있다./청와대

대통령은 “남은 임기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그 1년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으로 연설을 끝맺었다. 고개를 가로젓던 사람들도 이 대목에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 불안은 더 커졌다.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한 정권이 국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는 1년으로 충분하다는 걸 겪어봤기 때문이다.

실패한 정책은 작은 효과 다음에 그 몇 배, 몇 십 배 역효과(逆效果)가 뒤따르거나 정책 도입 초기엔 일시적 부작용(副作用)이거니 하고 참았으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정책 등 여러 가지다. 정책 효과는 지금 세대가 따먹고 비용 부담은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는 양심불량(良心不良) 정책도 많다. 정책 수립 근거와 정책 효과를 허위 통계로 조작하는 사기성(詐欺性) 정책도 이 정권에서 드물지 않았다.

195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공적(公的) 지원을 받는 각급 학교에서 인종차별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지혜로웠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판결의 방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즉각적 흑백 통합을 명령했더라면 당시 미국 남부(南部) 상황에선 광범위한 유혈(流血) 사태를 피하기 어려웠다. 대법원은 흑백을 통합하되 ‘그 속도는 신중하게 조절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옳은 방향’과 ‘적절한 속도’를 함께 확보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은 4년 내내 ‘옳은 방향’과 ‘적절한 속도’ 가운데 어느 한쪽을 헛짚거나 더러는 두 가지 모두를 잃은 정책을 고집했다. 부동산 정책이 대표 선수다. 학생운동 때 버릇을 국정 운영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은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 대통령의 성패(成敗)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사용해 잘못된 정책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 대통령 전임자들은 대부분 과거의 잘못된 정책을 버리는 정책 전환을 결단(決斷)함으로써 업적을 남겼다.

40대의 박정희 대통령 생각 바탕에는 상당한 좌파적 사고가 깔려있었다. 1960년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제3세계 지도자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과거에 수입하던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수입 대체 산업 육성을 경제 정책의 제1 목표로 삼았다.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달리 수출 주도(主導) 경제성장으로 정책 전환에 도전했고 이것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건강보험 도입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소산(所産)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국회의원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에 앞장서 반대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대중문화 상호 개방 정책을 결단하고 지지 세력을 설득했다. 이것이 ‘K’라는 글자를 단 한국 대중음악과 영화 산업을 세계 주류(主流)로 올려세웠다. 한·미 FTA 체결,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도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 노무현의 생각을 버리고 밀고 나갔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극약(劇藥)이다. 소량(小量)을 적시(適時)에 사용해야 한다. 이 약을 너무 자주 쓰거나 거꾸로 쓰면 나라가 뒤집힌다. 조국씨가 정권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가족의 잘못은 그냥 넘기기 어렵다’가 바른 처방(處方)이었다. 대통령은 위법과 범법(犯法) 논란을 알면서도 그를 법무장관으로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거꾸로 사용한 것이다. 대통령은 ‘탄소 중립(中立) 선언’에 호응한다면서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만 언급하고 원전 폐쇄는 은근슬쩍 말없이 뭉개고 지나갔다. 정직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약을 삼켜 원전 폐쇄라는 잘못된 정책의 족쇄를 풀어야 했다.

남은 임기 1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아니다. 권력 분립(分立) 허물기, 소득주도성장, 북한에 대한 미련과 집착, 한·미 동맹과 한·중 관계 사이의 비중(比重) 설정 혼선 등 겹겹의 족쇄를 차고 걷기에는 1년도 팍팍한 세월이다. 대통령은 영영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치학’을 못 깨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