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기자회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1974년인가, 닉슨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CBS의 댄 레더와 나눈 단 두 마디의 설전(舌戰) 장면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공격의 선봉에 섰던 댄 래더가 질문자로 지명받자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닉슨은 래더를 향해 “어디 출마라도 하셨냐?(Are you running for something?)”라고 농조로 선공(先攻)을 했다. 래더는 즉각 반박했다. “대통령께서도?(Are you?)”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대통령과 기자가 일대일로 맞서는 것 같은 장면은 아무리 미국이라도 분명 문제가 있다. 당시 미국 여론도 댄 래더가 무례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CBS는 기자로서 래더의 공격성과 저돌성을 인정해 그를 24년간이나 메인 앵커로 썼다.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장(場)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대통령과 기자들 간에 불꽃 튀는 논쟁이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 언짢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기자들은 일단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거기에는 질문 내용에 제한이 없고 시간도 제한이 없다. 회견을 여는 것은 대통령 쪽이지만 회견을 끝내는 것은 기자단이 정한다. 기자회견을 영어로는 프레스 콘퍼런스(press conference)라고 하는 것도 기자가 묻고 상대방이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가 언론과 ‘회의(會議)’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토론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언행을 하는 언론은 결국 도태되게 마련이다. 월남전 때문에 언론의 비판에 시달린 린든 존슨 대통령도 그에 관한 기록물에서 자기들끼리는 기자들을 아주 저급한 단어(SOB)로 욕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그렇다. 언론은 권력의 적(敵)이며 권력 쪽에서 보면 SOB다. 그러나 언론 쪽에서는 권력자에게 대들어야 언론인 것이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4주년 기자회견을 보는 심경은 떨떠름했다. 미국과 비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코로나 창궐이라는 인류의 재앙을 비켜 갈 수 없는 상황임도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어디서도 ‘권력과 언론’이라는 정상적 대립 구도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진솔하게 설명하거나 실수를 사과하는 대목도 없고 기자들이 그것을 추궁해 들어가는 저돌성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터’이기는커녕 한 편의 합동 쇼 같았다. 결국 대통령과 언론 양쪽 모두 패배자가 됐다.
회견인지 연설인지 구별도 안 되는 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여기서 임기를 1년 앞당겨 마감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국민 거의 모두가 체감하는 ‘현실’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애써 ‘성과’로 감싸려는 억지에 많은 국민은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꼈으리라. 극성 지지층의 아성에 갇혀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문 대통령의 위상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보편적 한국 국민에게 대통령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각종 인터넷 매체에 등장하는 대통령 비하(卑下) 표현은 차마 지상(紙上)에 옮길 수 없는 정도다.
또 다른 패배자는 언론이다. 회견을 본 많은 사람이 기자를 ‘들러리’라고 표현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어렵고 사람들의 심정이 얼마나 어두운데 언론이 대통령을 상대로 묻고 추궁한다는 것이 고작 그 정도냐는 힐난도 들렸다. 기자단이 스스로 무슨 룰을 만들고 질문 내용을 어떻게 조율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 편에서, 독자와 시청자 편에서 그들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는 살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터뷰나 회견에서 중요한 것은 보충 질문(follow-up question)이다. 보충 질문이야말로 본(本)질문이다. 보충 질문 없는 인터뷰나 회견은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리고 기자는 일단 의도적으로라도 상대방과 반대편에 서야 한다. 특히 상대방이 권력일 때 더욱 그렇다. 권력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단이 보충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기자회견에는 룰이 없어야 하는 것이 룰이다.
세계의 수많은 권력자를 인터뷰한 이탈리아 기자 겸 작가 오리아나 팔라치는 권력자들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대체로 교양도, 지식도, 철학도, 세계관도, 인내심도, 가정교육도, 감성도, 지성도, 윤리관도 일반인보다 낫지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거대한 탐욕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끝없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는 이 탐욕과 잔인함을 견제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