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65회>
마음이 교만한 정치인들은 과거사를 제멋대로 주물러서 세상을 우롱한다. 틈만 나면 그들은 얕은 지식을 끌어와 역사의 맥락에서 벗어난 허황된 주장을 마구 펼친다. 이념의 “죽창”을 휘두르는 그들은 늘 목소리가 격하고 눈초리가 사납다. 오도된 확신일까? 정치적 연막일까? 결국 “내 편 네 편”을 갈라 정치적 편익을 취하는 얄팍한 선동의 기술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인사가 고교생들을 향해 1945년 8월 한반도에 진입한 소련군은 해방군이며 미군은 점령군이라 부르짖었다. 그 주장의 근거란 게 고작 당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극동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1900-1979)의 포고문이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소련군의 프로파간다만 보고 “소련군=해방군”이라 단정하진 않는다. 그 당시 스탈린(1878-1953)이 자행했던 대규모 정치탄압, 계급학살, 종족몰살(genocide), 대민테러의 사례를 익히 듣고 읽어서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미적분 문제를 척척 푸는 고교생임에랴.
점령, 적국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접수하는 일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미화하는 세력은 언필칭 미군을 “점령군”이라 비난한다. “점령”이란 한국어 단어의 부정적 함의를 오용해서 미군이 남한을 식민지 삼으려 했다고 둘러치는 교묘한 선동에 불과하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전 미·소는 공히 1945년 2월의 얄타협정에 따라 남·북한 영토의 점령을 서둘렀다. 여기서 ‘점령’이란 이국 군대가 한 나라의 영토에 들어가 그 나라를 지배하는 적국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접수하는 “군사 점령(military occupation)”을 의미한다. 침략, 침공과는 달리 ‘점령’이란 단어 자체엔 침탈, 식민화 등의 부정적 함의는 없다. 그 자체는 그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군사적 개념일 뿐이다.
70년 소련의 역사를 돌아보면, 소련군은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했다. 어느 나라를 점령하든 소련군은 늘 “해방군”을 자처했다. 그들이 부르짖는 “해방”이란 제국주의 지배체제를 허물고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구조를 무너뜨린다는 판에 박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구호일 뿐이었다. “해방”의 선전과는 달리 소련군이 가는 곳엔 약탈, 방화, 강간, 학살 등 수많은 반인류적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중공 정부 말단 관원도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미화하지 않아
구체적 사례를 보자. 볼셰비키 혁명 직후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침공(1917-1920)을 감행했다. 그 결과 10년 쯤 지나 우크라이나에선 수백만에서 최대 1천만 명이 아사하는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참상이 벌어졌다. 그밖에도 트로츠키와 스탈린 등이 이끈 폴란드 침공(1920), 스탈린 주도의 조지아 침공(1921), 독·소 비밀 조약 이후 폴란드 침략(1939),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침공(1939-1940), 영·소 합동 작전의 이란 침공(1941), 자유화 운동을 탱크로 짓밟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침공(1956), 프라하의 봄을 빼앗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968), 8년에 걸쳐 50만에서 200만의 인명 피해를 낳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1989) 등등 “해방”의 깃발을 들고 인민의 자유를 짓밟는 소련군의 만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재 중공 정부의 말단 관원도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미화하는 우(愚)를 범하진 않는다. 1945년 8월 9일부터 파죽지세로 만주에 진입했던 소련군의 반인류적 범죄 실상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주로 진격한 소련군은 잔류하던 일본 민간인 아녀자 1천여 명을 비참하게 강간·살해하는 이른바 “거건먀오(葛根廟, 갈건묘)”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어서 소련군은 랴오닝의 선양(瀋陽)에서 사흘간 법망을 완전히 벗어나 강간, 약탈, 방화 등 반인류적 범죄를 이어갔다. 소련군의 만행을 참다못한 하얼빈 시민들은 “홍색(紅色) 제국주의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저항할 정도였다.
북 진격한 소련군 강간 약탈에 신의주 시민 시위..100여명 학살당해
1945년 북한으로 진격한 소련군이 갑자기 순한 양떼로 돌변했을 리 없었다. 강간, 약탈 등 두 달 넘게 이어진 소련 점령군 병사들의 비행과 만행에 격분한 신의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1945년 11월 23일 소련군의 총탄을 맞서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소련 측 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날 100백여 명의 학생들이 학살당했고, 7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1945년 8월 미국은 일제 치하의 한반도 38선 이남을 점령했고, 소련은 이북을 점령했다. 미·소 분할점령의 결과 남한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식됐고, 북한엔 스탈린식 공산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개개인이 누리는 인간의 기본권과 경제수준을 보면, 남한은 이미 “해방”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모든 지표가 웅변하는 세계인의 상식이다.
그럼에도 몽매한 정치인들은 특정의 과거사를 함부로 오려내선 맘대로 찢고, 가르고, 짜고, 깁고, 섞고, 엮고, 깎고, 비틀고, 부풀리고, 우려먹고, 튀겨먹는 교활한 날조, 허황된 조작을 이어간다. 그들은 왜 그토록 역사왜곡과 거짓선동에 몰두할까? 1971년 1월 중공 최고의 영도자 마오쩌둥이 갑작스레 개진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속에 그 해답이 엿보인다.
비림비공 운동,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라!
중공서열 제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린뱌오는 1971년 9월 13일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추락사했다. 거의 3년 반이 지난 1974년 1월 18일,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공자(孔子)를 동시에 비판하는 기상천외한 정치운동을 개시했다. 이른바 “비림비공” 운동이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가 유가오경(儒家五經)을 제국의 이념으로 채택한 이래 공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상징적 인물로 존숭돼 왔다. 전근대 중국의 역사를 싸잡아 해방 이전의 봉건시대라 규정하는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단선적, 기계적, 이분법적 역사관에 따르면, 공자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봉건”적 지배이데올로기의 아이콘이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박살내자는 “파사구(罷四舊)”의 구호 아래 전통시대 유산을 근본적으로 청산하려 했다. 중국의 각지에선 공묘(孔廟)와 관련 문물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의 광풍이 일어났다. 1966년 12월 산둥성 취푸(曲阜)에 몰려간 홍위병들은 공자의 유골을 훼손하기 위해 무덤을 파헤치고 유물을 대량으로 훼손했다.
물론 문혁 시절 제2인자였던 린뱌오는 파사구의 광풍을 부추기고 주도했던 선전선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린뱌오가 놀랍게도 공자와 함께 비판을 당하는 급반전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린뱌오가 공자와 동급으로 비판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어떻게 린뱌오와 공자를 엮는 역사의 마술을 부렸을까?
린뱌오가 죽고 나서 그의 가택이 초토화됐다. 이른바 “초가(抄家)”의 과정에서 집안 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현판이 하나 발견됐다. 그 현판 위엔 “극기복례(克己復禮)”란 네 글자가 씌어 있었다. <<논어(論語)>><안연편(顔淵)>편에 등장하는 “극기복례”는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공명정대한 보편가치를 실현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2천 년 내내 널리 쓰여 중국인의 입에 속담처럼 달라붙은 바로 그 글귀가 “비림비공”의 도화선이 됐다.
린뱌오 집에 있던 ‘극기복례(克己復禮)’ 현판이 도화선
1974년 2월 중공중앙의 기관지 <<홍기>>에는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대비판조”가 작성한 “린뱌오와 공맹지도(孔孟之道)”란 제목의 격문이 실렸다. 유명 대학 학생들의 입을 빌었지만,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장칭의 사주로 급히 작성된 “비림비공” 운동의 선언문이었다.
“린뱌오가 거주하던 검은 소굴엔 도처에 유가 사상의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공학(孔學)의 썩은 내음이 진동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실이 증명하듯, 반동적인 공맹지도가 바로 린뱌오 수정주의의 중요한 원류였다. 린뱌오 일당은 정치상 자본주의 복원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당의 이론적 기초를 바꾸려 했다. 또한 조직적으로 투항자를 부르고 배신자를 받아들여 사당(死黨)을 결성하고 반혁명의 대오를 규합하여 책략 상 크게는 반혁명 양면작전을 구사하며, 음모의 궤계(詭計)를 썼는데, 공맹지도에 기대고 매달렸다.”
이어서 이 격문은 “극기복례”가 “노예제를 되살리려 했던 공자의 반동 강령”이라 규정한 후,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는 린뱌오는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한 늑대 같은 야심가”라 비판한다. 공자가 노예제의 복원을 희구했듯 린뱌오는 자본주의의 복구를 염원했다는 주장이다. 린뱌오는 류샤오치가 주자파로 몰려 숙청된 틈에 제2인자의 지위에 오른 문혁 최대의 수혜자였다. 린뱌오가 왜 공자를 숭배하며 자본주의를 되살리려 했을까? 문혁을 직접 겪었던 그 어떤 중국인도 납득할 수 없었다. 린뱌오를 공자의 제자로 모는 언어는 그만큼 허황되고 일방적이었다.
“린뱌오는 공자의 천명론, 천재론을 이용해서 유물론에 반대하고, 중용(中庸)의 도를 이용해서 유물변증법에 반대하고, 유가의 ‘덕(德), 인의(仁義), 충서(忠恕)’를 이용해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반대하고, 변증유물론과 역사유물론에 대항해 전면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유가가 선양하는 인성론(人性論)은 일종의 허위의 유심주의 이론이며, 선험(先驗)의 초계급적 인성을 의미한다. 공자가 말하는 ‘어진 마음(仁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며, 맹자가 말하는 어진 마음은 나면서 절로 있는 사람의 성선(性善)을 의미한다. 그들은 진정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나? 가당치도 않다.······ 수정주의자의 우두머리 린뱌오의 무리가 공자를 존숭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엔 심각한 계급적, 역사적 근원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의 영도 아래서 철저한 무산계급 혁명정신을 발양하고, 비림비공 투쟁의 새로운 승리를 쟁취해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 영원히 무산계급의 사상 진지를 점령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린뱌오는 문혁 내내 “마오쩌둥 어록”을 편찬해서 전국의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린뱌오가 창졸간에 공자의 숭배자로 둔갑했다. 그 혹독한 비판의 근거는 “극기복례”의 현판 하나였다. 1971년 시작된 “비림비공”의 돌풍은 최소 반년 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음험한 정치운동의 실제 표적은 서주(西周) 시대 주공(周公)에 비견되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였다.
못된 정치가들은 상습적으로 역사를 악용한다. 역사학이 정치에 복무할 때 어김없이 “비림비공”의 코미디가 연출된다. 소비에트 프로파간다를 근거로 소련군을 “해방군”이라 부르짖는 촌극과 다르지 않다. 그 모두가 배운 무식자(learned ignoramus)의 견강부회(牽强附會)다. 영어의 표현을 빌면, “우리 지성에 대한 모독이다(an insult to our intelligence).”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