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종합예술공연센터인 '링컨센터'에서 공연 리허설 중인 로커 한대수씨. 2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렸다. /뉴욕한국문화원 촬영

지난 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명 공연장 링컨센터. 야외 공연장 그늘 한쪽에서 백발의 로커 한대수(73)씨가 기타를 메고 밴드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대표곡 ‘물 좀 주소’를 연습하고 있었다.

30도 넘는 무더위에서 2시간을 서서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를 비롯해 여러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링컨센터 관계자들은 “저 나이에 대단하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강렬하고 매력적”이라며 감탄했다.

한씨는 오는 24일부터 닷새간 링컨센터에서 열리는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 중이었다. 팬데믹 이래 처음 개장한 링컨센터가 코로나에 지친 뉴욕 시민을 위로하고 예술과 인간성 회복을 주제로 여는 ‘유 아 히어(You Are Here)’란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한국인으론 유일하게 한씨가 초청됐다. 한국 예술가 추천을 의뢰받은 뉴욕 한국문화원이 후보 명단을 건네자 링컨센터가 “코로나 시대 뉴욕의 아픔을 잘 알고 뉴욕의 희망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술가”라며 한씨를 선정했다고 한다.

‘유 아 히어’는 안무가 안드레아 밀러, 사운드 아티스트 저스틴 힉스, 프로덕션 디자이너 미미 리엔 등 정상급 예술가들이 공동 연출한다. 뉴욕 무용단 ‘갈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카운터테너 앤서니 로스 코스탄조, 뉴욕 시티발레단 수석 테일러 스탠리, 트럼펫 연주자 알폰소 혼 등 유명 아티스트 30팀이 출연한다. 주로 클래식 음악과 발레·무용, 연극 등 순수예술계 꿈의 무대인 링컨센터에 한국 대중 음악가가 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7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 리허설 중인 한대수씨(가운데)와 밴드 멤버들. 한씨는 오는 24일부터 닷새간 링컨센터의 개장을 알리는 공공예술 프로젝트 '유 아 히어(You Are Here)'에 세계적 예술가 30팀 중 한국인으로선 유일하게 초청받아 무대에 선다. /뉴욕한국문화원

– 이번에 무슨 노래를 부르나.

" ‘물 좀 주소’ 외에 ‘행복의 나라로’, ‘No Religion(종교는 없다)’과 연주곡들을 공연한다. ‘물 좀 주소’는 1970년대 한국 군사정권 시절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지금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냐”란 이유로 금지됐던 곡들이다.”

지난 7일(현지시각)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공연 리허설 중인 로커 한대수씨. /사진작가 조지 정

– 반세기 전 저항 문화의 상징이었던 노래를 뉴요커들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내가 열아홉, 스무 살에 이 노래들을 만들 때 정치적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모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개인적 애정 결핍 때문에 나온 노래인데 그렇게 해석을 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여전히 고통과 갈증 속에 사는 것 같다. 코로나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곳곳에서 빈곤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지 않나. 아직 세계는 ‘물’과 ‘사랑’이 필요하다.”

– 그래도 자유와 민주주의는 진보하지 않았나.

“그렇게 보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인터넷을 들고 나오면서 세계가 더 자유롭게 소통할 거라고 했는데, 지금 소셜미디어가 정말 인간을 자유롭게 하나?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욕하고 공격하지 않나. 인터넷은 지적인 생각을 나눌 수 없는 공간이 됐다.”

1967년 미 뉴햄프셔대 수의학과를 자퇴하고 뉴욕 사진학교에 다닐 당시의 한대수. 그의 나이 19세였다. 이때 뉴욕 히피 문화의 세례 속에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을 했던 그는 한국에 '포크록' 장르를 선보이며 파란을 일으켰다. /한대수씨 제공

– 세계 문화 수도 뉴욕도 팬데믹 동안 예술계는 암흑기였는데.

“예술이 원래 배고픈 것이지만 뉴욕 예술인들이 팬데믹으로 수입이 끊기면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실력으로나 야망으로나 세계 최고를 자처하고 뉴욕에 몰려든 이들이 집세도 내지 못해 택시 운전이나 식당 웨이터를 하고 있더라. 그런 상태에서 예술이 되겠나.”

일부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초점을 맞추지 않은 '뉴욕 히피' 한대수의 얼굴이 담긴 1집 음반. 1974년에 나왔다. /조선일보 DB

– 뉴욕에 부자들이 많은데 예술인 후원은 없나.

“예술인 지원금이 있긴 하지만 선정되는 건 극소수다. 99%는 어떻게 해야 뽑히는 건지도 모르고 탈락한다. 나도 50년 뉴요커지만 그런 건 못 받아봤다. 팬데믹 동안 납세자로서 받는 정부 수당 약간 받고, 광고 사진 찍어서 생계를 유지했다.”

한대수씨가 한국에 머무르던 2014년 서울 신촌의 한 커피숍에서 전시에 내놓을 사진 수정 작업을 하는 도중, 초등학교 1학년 딸 양호가 이를 구경하고 있다. 환갑이 다 돼 얻은 유일한 자식이다. ‘아빠’ 한대수가 작업하는 사진 속에 젊은 날 누드 차림의 ‘엄마’ 옥사나가 보인다. /조선일보 DB

한씨는 서울대 공대를 나온 핵물리학자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 간 아버지가 10년간 실종되고 어머니는 재혼했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산 기억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의 후원으로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한씨는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1992년 뉴욕에서 만난 몽골계 러시아인 옥사나 알페로바(51)와 결혼해 딸 양호(14)를 낳았다. 옥사나가 알코올의존증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양호는 아기 때부터 한씨가 도맡아 키웠다.

– 최근 뉴욕에서 어떻게 살았나.

“맨해튼 집세가 너무 비싸 퀸스로 이사했는데, 세계에서 코로나로 가장 크게 타격받은 게 그 동네다. 시신 보관할 냉장실이 없어 시신 가방이 거리에 굴러다니고, 하루에 800명씩 죽어나갈 정도였으니…. 두 딸(아내와 딸을 이렇게 표현했다)은 집 밖으로 못 나오게 하고 내가 새벽마다 이 교회 저 교회 돌면서 스팸과 감자 같은 걸 받아와서 밥해 먹이고, 종일 청소·빨래 하고 학교 못 가는 딸과 놀아줬다. 주부의 삶은 너무 힘들다.”

로커 한대수씨는 한국에서 딸 양호를 낳았지만, 혼혈인 딸 양호의 교육 때문에 다문화 환경인 뉴욕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난 2017년 뉴욕 아파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녀. /한대수씨 제공

–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몰랐다.

“파스타, 된장찌개… 딸들이 해달라는 것 다 해준다. 할아버지가 ‘한국 축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하셔서 내가 뉴햄프셔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는데, 그걸 때려치우고 사진 한다니까 집안 지원이 끊겼다. 실종됐다가 10년 만에 롱아일랜드에서 다시 찾은 아버지는 애가 열 명인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어서 내게 돌아올 유산이란 게 없었고… 그래서 쥐가 들끓는 뉴욕 빈민굴에 들어가 시급 2달러짜리 식당일을 했는데 그때 요리를 배웠다.”

한국의 유명한 히피와 마주앉아 육아와 살림의 고단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자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씨는 2019년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으로 뉴욕의 응급실에 두 번 실려가고 난 뒤, ‘양호가 대학 갈 때까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50년 피운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그는 “딸을 키워보니 여자나 남자나 똑같다고 생각했던 게 틀렸다는 걸 알았다. 젊을 때 여자들을 젠틀하지 않게 대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 딸이 예술을 하겠다면 그러라고 할 것인가.

“양호가 나한테 기타를 좀 배웠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데, 경제 공부를 했으면 한다. 화폐(돈)를 벌어야 하니까. 예술은 희망만으론 되지 않는다. 이제 돈이 사랑이고 권력 아닌가. 예술도 화폐를 벌지 못하면 바보 취급 받는다. 서글프지만 이게 현실이다.”

지난 7일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에서 리허설을 하던 도중 포즈를 취한 로커 한대수씨. /사진작가 조지 정

– 세상이 발전하는데 왜 예술 하기는 더 힘들어지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예술은 인간의 노력으로 승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미술도 음악도 컴퓨터로 쉽게 만들고 쉽게 소비하다 버린다. 예술의 존엄과 희생, 고통이 없어졌다. 순수예술에서 대가(大家)가 나올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그렇지만 우리가 계속 찾아보고 영감을 받는 예술은 무엇인가? 바흐와 말러·베토벤의 음악, 르네상스 시대 회화 아닌가? 지금 생산되는 예술이나 예술인들이 처한 현실을 보면, 난 이제 진정한 예술이 뭔지 잘 모르겠다.”

– 한국은 물론 뉴욕에서도 인정받는 선생이 진정한 예술이 뭔지 모르겠다는 게 말이 되나.

“예술 하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다. 나도 내 음악이 세계 최고다. 뭐 90%는 노망이지만…. 하하!”

–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기여하는 예술의 효용은 무엇인가.

“현대 기술과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여러 문제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이 설득하지 못하는 부분, 즉 도덕성과 예의, 배려, 난민·환경 문제와 성평등, 아이들의 미래 같은 화두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게 아트의 위대함이다.”

한국의 밥 딜런, 한대수씨. /한대수씨 제공

– 당신 노래를 탄압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작고 가난했던 나라가 이렇게 빨리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예가 없다. 그때 우리나라는 ‘물 좀 주소’보다 줄 ‘물’ 자체가 없는 가난의 극복이 더 절실했다. 박 전 대통령이 나쁜 일도 했지만, 나라의 미래를 보면 그분이 이룬 경제적 성과는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씨는 “이젠 힘들어서 노래를 더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이번 링컨센터 공연이 생애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에도 15집 음반 ‘하늘 위로 구름 따라’를 내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그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대수는

1948년 부산 출생. 경남중·고를 거쳐 1966년 뉴햄프셔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1969년 송창식·윤형주·조영남이 활약하던 ‘세시봉’에 당시로선 생소한 포크록을 들고 데뷔했으며, 1970년대 ‘물 좀 주소’ 같은 실험적 자작곡에 자유분방한 히피 스타일로 파란을 일으켰다. 김광석·김민기·양희은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불렸다. 군사정권을 피해 도미했던 그는 2000년대 한국에 돌아와 가수와 라디오 DJ,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 2016년부턴 뉴욕에서 아내·딸과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