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조선왕실 별궁(別宮) 터였고 최근까지 풍문여고 학교터였던 서울 안국동 175번지에 서울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던 그 권위적 공간이 왕조 500년 동안 천대받던 무명씨 장인(匠人)들을 기리는 공간으로 변했다. 좁다면 좁은 이 공간을 찬찬히 뜯어보면 조선 왕국이 500년 동안 걸어온 발자국이 또렷하게 보인다. 법을 바꿔가며 막내에게 집을 지어준 세종에서 변란 와중에도 고모가 살 집 공사를 강행한 인조 그리고 왕조 사상 최고 호화판 혼례식을 치러낸 고종 왕비 민씨와 식민 시대 최고 갑부 민영휘까지, 이 땅을 차지했던 사람들 이야기.
세종의 죽음과 안국동 동별궁
1450년 2월 17일 개국한 지 100년도 되지 않은 조선 왕조 기틀을 닦고서 세종이 죽었다. 각종 성인병을 동반한 채 과로로 몸을 혹사시킨 왕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주소로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4, 지번으로는 안국동 175번지 막내아들 영응대군 이염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죽었다. 천재들을 지휘해 조선의 군사와 과학과 성리학 질서 구축을 마무리한 천재요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했던(終始以正·종시이정)’ 군주였다.(1450년 2월 17일 ‘세종실록’)
1450년 2월 4일 세종은 막내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로도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에는 물 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2월 15일 승려 50명이 별궁에 모여 임금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렸다. 운명을 예상했는지, 그날 세종은 대사면령을 반포했다. 다음 날 병세가 악화된 왕은 모든 정사를 정지했다. 다음 날 세종은 하늘로 갔다.
부동산 갑부 영응대군 이염
세종은 나이 서른일곱에 생긴 막내아들 염(琰)을 끔찍이 사랑했다. 궁중 예법에 따라 다른 아들들은 아비인 왕을 ‘진상(進上)’이라 불렀으나 염만은 무릎에 앉히며 “15세까지는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영응대군 신도비’)
염이 열 살 되던 1444년 세종은 경복궁 사정전에서 규수들을 면접하고 여산 송씨 여식을 며느리로 간택했다. 아들이 처가에 사는 동안 세종은 영응대군 거처를 준비했다. 2년이 지난 1446년 안국동에 집을 짓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고 집터를 골랐다. 실록에 따르면 ‘그때 건축하는 비용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1446년 3월 7일 ‘세종실록’)
또 2년이 지난 어느 날 세종이 이리 말했다. “여러 아들 집을 짓는데 남의 집을 많이 헐어서 비웃음이 많았으나, 왕자로 하여금 성문 밖에 나가 살게 할 수야 있겠는가.” 그리고 본심을 말했다. “옛법에 따르면 대군 집 대들보 길이는 8척밖에 안 되니 너무 좁다. 대들보 길이를 10척으로 확장하려 한다. 내 결정이 틀렸나.” 법을 바꿔서 아들 집을 넓히겠다는 말에, 신하들은 만장일치로 화답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꼭 옛법을 지키며 짓지 않사옵니다.”(1448년 12월 14일 ‘세종실록’) 며칠 뒤 지관 이현로가 “좋은 땅이 (땅을 닦고 있는 여러 후보지 가운데) 안국동만 한 데가 없다”고 아뢰자 드디어 안국동 인가 60여 채를 헐었다.(1448년 12월 14일 ‘세종실록’)
이듬해 여름 집현전에서 “대군의 저택이 너무 화려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이 “다른 아들들 집과 다를 바 없는데 무슨!”하며 화를 내자 대신들은 “절대 지나치지 않으니 공사를 진행하시라”고 답했다.(1449년 7월 27일 ‘세종실록’) 공사는 강행됐고, 영응대군은 부동산 거부가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세종이 죽고 왕에 즉위한 맏형 문종은 세종 유지를 받들어 궁중 금고 내탕고에 있던 보물을 모두 막내에게 주었다. 왕실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화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갔다.(1467년 2월 2일 ‘세조실록’)
권력투쟁, 그리고 살아남은 별궁
혼례를 치르고 5년이 지났지만, 송씨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세종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영응대군과 며느리 송씨를 강제 이혼시키고 해주 정씨 여식에게 장가를 보냈다. 여러 만금의 진귀한 보물을 또 선물로 주었다.(1449년 6월 26일 ‘세종실록’)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다. 문종 또한 영응대군이 사는 이 동별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1453년 10월 10일 밤 중무장한 수양대군 무리가 서대문에 사는 김종서를 찾아가 이리 물었다. “영응대군 부인 일을 종부시(宗簿寺·왕실 감찰 부서)에서 조사 중인데, 정승께서 지휘하시나?”(1453년 10월 10일 ‘단종실록’) ‘영응대군 부인 일’은 전처 송씨와 재결합한 일을 말한다. 입을 다문 김종서 머리 위로 철퇴가 날아갔다.
해주 정씨를 아내로 맞은 영응대군은 옛 아내 송씨를 잊지 못했다. 궁에서 쫓겨난 송씨는 친오빠 송현수 집에 얹혀 살았다. 송현수는 수양대군과 친구였다. 수양대군은 수시로 막내 영응을 친구네 집으로 데려갔고, 그 새에 둘 사이에 딸이 둘 태어났다.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한 달 뒤인 1453년 11월 28일 수양은 왕명으로 정씨를 폐출시키고 막내를 옛 아내 송씨와 재결합시켰다.(1453년 11월 28일 ‘단종실록’)
이어 수양은 친구 송현수 딸을 자기 조카 단종에게 시집보냈다. 권력 주변을 측근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본인이 왕이 되었다. 용도폐기된 친구 송현수는 장 100대를 맞고 관노로 전락했다.(1457년 8월 16일 ‘세조실록’) 그리고 두 달 뒤 결국 정난공신들 강청에 의해 교형(絞刑)됐다.(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
그 와중에 살아남은 영응대군은 안국동 별궁을 지켰다. 후사가 없자 영응은 연안 김씨와 또 혼례를 치렀다.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든 1466년 세조는 별궁을 찾아 막내와 술잔치를 벌였다.(1466년 1월 19일 ‘세조실록’) 이듬해 영응이 죽었다. 별궁은 아내 송씨 소유가 됐다.
중요하되 대세와 무관한 주인들
1471년 혼자 살던 송씨가 별궁을 성종에게 바쳤다. 성종은 이 집을 ‘연경궁’이라 부르고 형인 월산대군에게 하사했다.(1471년 7월 24일, 1472년 12월 2일 ‘성종실록’) 이에 월산대군은 살고 있던 정동 집에서 안국동으로 이사했다.(강진철, ‘안동별궁고’, 아시아여성연구 2집,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1963) 100년 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주했던 선조는 환도 후 정동 월산대군 집을 궁으로 삼고 살았다.
또 벌어진 호화 건축 공사
월산대군이 죽고 비어 있던 안국동 집은 1522년 중종 때 맏옹주였던 혜순옹주에게 하사됐다가 인조 때 다시 정명공주에게 넘어간다. 정명공주는 광해군에 의해 폐위당한 인목대비의 딸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에게 인목대비와 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한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한성 한복판에서 자그마치 3백간짜리(1625년 2월 27일 ‘인조실록’) 주택 건축 공사가 벌어졌다. 집터는 광천위(光川尉), 중종 때 혜순옹주 남편 김인경 옛집이었고 때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달아났다가 환도한 지 반년도 안 된 1624년 한여름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수도가 함몰되고 종사가 파천하는 변란을 막 겪었다. 어찌 가졌어도 거듭 갖고 집 위에 집을 더하려고 하는가.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 (공주 집 신축 공사 명을) 거두시라.” 사간원이 반발했지만, 국가 목재와 기와를 지급해 공사를 하겠다는 인조 뜻은 꺾이지 않았다.(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안국동은 돌과 나무가 도로에 쌓였고 종들은 남의 담장 돌을 빼갔으며, 사족의 부녀자들을 욕보이기까지 하는 난장판으로 변했다.(1625년 3월 2일 ‘인조실록’) 집 또한 주춧돌만 봐도 크기가 수백 칸에 이르러 지나가는 사람이 저절로 오싹해질 정도로 사치스러웠으나 인조는 ‘오히려 좁고 작다고 여겼다’.(같은 해 2월 27일 ‘인조실록’)
초호화판 혼례식과 임오군란
그 땅에서 1882년 2월 조선 왕조 최고 호화판 결혼식이 벌어졌다. 고종과 왕비 민씨 맏아들, 왕세자 이척과 여흥 민씨 처녀 혼례식이었다.
1879년 고종이 별궁 건축을 명했다. “경비가 궁색하니 토목 공사가 맞지는 않지만 별궁(別宮)이 없는 것도 온당치 않다. 지어라.”(1879년 11월 15일 ‘고종실록’) 나흘 뒤 별궁 터는 정명공주 옛집으로 결정됐다. 공사는 1880년 9월 끝났다. 그리고 1881년 12월 9일 안국동 별궁이 세자 혼례식 장소로 결정됐다.
1882년 2월 22일 여덟 살 먹은 세자 이척과 열 살짜리 여흥 민씨 혼례가 안동별궁에서 거행됐다. 궁중 물자 목록인 ‘궁중발기’에 따르면, ‘혼수용 이불만 560채에 이르러' 이틀에 3채씩 덮어도 한 해 다 덮지 못할 정도로 인조 이후 사상 유례없는 호화판이었다.(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p377~394)
그리고 넉 달 뒤 왕십리 하급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13개월 치 밀린 월급을 요구하며 왕비 일족을 대거 살해했다. 1966년 채록된 당시 상궁들 증언에 따르면, 왕비 민씨는 “며느리가 복이 없어서 난리가 났다”며 열 살짜리 며느리가 그 무거운 가채를 쓰고 아침 문안을 와도 저녁까지 세워 놓기 일쑤였다.(김용숙, ‘궁중용어 및 풍속 채집보고서1’, 아시아여성연구 5집,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원, 1966)
왕조 500년 내내 안동별궁은 왕족의 땅이었고 백성과 철저하게 유리된 공간이었다. 별궁 북쪽에는 서광범이 살았고 서재필이 살았다. 더 북쪽에는 김옥균이 살았다. 동쪽에는 홍영식이 살았다. 홍영식 옆집에는 개화파 태두 박규수가 살았다. 이들이 일으킨 개화 혁명이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이들은 안동별궁 방화를 신호로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방화는 실패했고 대신 옆집 초가가 불탔다. 이 젊은 혁명가들이 안동별궁 방화를 거사 신호로 삼은 결정도 별궁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1930년대 별궁은 친일 갑부 민영휘 가문 휘문의숙 영신재단에 매각됐다.(1936년 7월 12일 ‘조선중앙일보’, 문화재청, ‘안국동별궁 이전복원 수리보고서’, 2009, p31, 재인용) 1945년 민영휘 후손은 그 터에 풍문여고를 개교했다. 옛 별궁 건물들은 경기도 고양 한양컨트리클럽을 포함해 민씨들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이축됐다가 일부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으로 이건됐다. 구내에 있던 ‘하마비(下馬碑)’는 서울 강남으로 이전한 풍문여고로 함께 가져갔다.
백성에게 돌아온 별궁, 박물관
그 폐쇄된 특권의 공간에 옛 천민(賤民)을 기리는 박물관이 들어섰다. 박물관 이름은 ‘서울공예박물관’이다. 종이를 만들고 붓과 벼루와 먹을 만들고 그릇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옷을 짓고 보자기를 만들고 돌을 깎고 쇠를 녹여 비녀와 노리개를 만들어 세상을 윤택하게 만들던, 그럼에도 500년 동안 천대받던 장인(匠人)들 작품과 그 이름이 당당하게 별궁 터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안국동 175번지, 이 땅에 숨은 사연이 참으로 많다.
* 유튜브 https://youtu.be/i_md5enzPik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