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이 떠나갈 듯 울리는 ‘파이팅’ 샤우팅. 다른 선수보다 반박자 빠른 대담한 슈팅. 고등학교 2학년 궁사(弓士) 김제덕(17·경북일고)은 코로나로 지친 국민 가슴을 사이다처럼 펑 뚫었다.

양궁선수 김제덕/네이버 스포츠

김제덕은 지난 4월 양궁 국가대표 마지막 평가전에서 김우진(29·청주시청), 오진혁(40·현대제철)에 이어 ‘턱걸이’로 도쿄행 티켓을 따냈다. 쟁쟁한 선배들을 제친 김제덕은 올림픽에 나가는 게 믿기지 않은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석 달 후 열린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 혼성, 남자 단체 2관왕에 올랐다. 미성년자라 다른 선수보다 백신을 늦게 맞은 김제덕은 지난 1일 귀국 후 경북 예천 집 근처 시설에서 자가 격리 중이다. 최근 전화로 만난 그는 “남자 단체 금메달을 목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운이 좋아서 혼성 단체 금메달까지 따서 영광”이라며 “응원해주신 국민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잡생각 많아 파이팅 외쳐

–조용한 양궁장에 퍼진 ‘파이팅’소리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외쳤나요.

“예천중학교 시절 선생님이 ‘단체전 땐 무조건 파이팅을 크게 외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경기 전 기합을 넣고 소리를 질렀죠. 올림픽 땐 잡생각이 없어지고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아서 거의 활 쏠 때마다 외쳤어요.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상상을 많이 했어요. 그랬더니 욕심이 생겨서 ‘이건 당연히 10점을 쏴야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집중력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소리를 지르니까 그런 생각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우리 팀 사기를 높이고 상대 팀에 부담감을 주는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경기 끝나면 수건으로 목을 감거나 따뜻한 물을 마시며 목 관리도 했어요. 형들한테 피해를 줄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

김제덕은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할 때도 일과가 끝나면 친구들과 전화나 메신저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귀국 후에도 격리 때문에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하자“얘깃거리가 줄어드는 것 같다. 같이 떡볶이 먹으면서 놀고 싶다”며“친구들이 올림픽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은 것을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네이버스포츠

–그래도 ‘오진혁 파이팅’도 외치던데, 대선배에게 혼나지 않았나요

“오진혁 선수는 저보다 스물세 살 많아요, 아빠 뻘이죠. 처음엔 조심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경기를 하다 보니 그게 안 됐어요. 자신감을 갖고 목표를 이루려면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저도 모르게 ‘오진혁 파이팅’이 나왔어요. 한번 하니까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형들도 뭐라고 하지 않고요.” 오진혁은 경기가 끝난 후 “사전에 얘기한 게 아니라 처음엔 놀랐다”면서도 “긴장은 풀렸다”며 웃었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요.

“남자 단체전 4강 슛오프(연장전)요. 김우진 선수가 처음 9점을 쏘고 일본 선수가 10점을 쐈어요. 제가 무조건 10점을 쏴야 하는 상황이라 부담이 컸어요. 지더라도 욕심 내지 말고 자신 있게 하자며 활을 쐈는데 7점부터 10점까지 어디 맞을지 감각이 없더라고요. 보통 활을 쏘면 ‘이건 몇 점’이란 느낌이 들거든요. 전광판을 봤는데 10점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당시 슛오프에서 양팀은 동점을 이뤘고, 김제덕이 쏜 화살이 일본 선수 10점 화살보다 과녁 정중앙에 2.4cm 더 가까워 한국이 이겼다.

김제덕이 지난 26일 도쿄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금메달을 확정한 후 주먹을 불끈 쥔 채 양팔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 /이태경 기자

–이번 올림픽 자신에게 몇 점 주고 싶나요.

“100점 만점에 200점요. 올림픽 메달이 쉬운 게 아니에요. 남자 단체전 금메달만 보고 도쿄에 왔는데, 혼성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땄어요. 처음 도입된 종목 결승에 오르니까 초대 챔피언이 될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혼성전에 함께 나선 안산(20·광주여대) 선수에게 바람에 대해 많이 얘기했어요. 끝날 때까지 우리 할 것만 잘하자고도 했죠. 제가 좀 방방 뛰는 성격이에요. 경기 도중 흥분하니까 안산 선수가 ‘조금 차분하게 하자’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개인전 때 표정도 안 좋고 파이팅도 안 외치더군요.

“목이 쉬었거든요. 그날 햇빛이 강해서 조준할 때 눈을 많이 찡그려서 표정이 안 좋게 보였을 거에요. 변명 같지만 단체전 끝나고 몸 상태가 평균 이하였어요. 하지만 개인전 탈락했다고 해서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었어요. 오히려 끝났단 생각에 속이 ‘뻥’ 하며 편안해졌어요. 남자 단체전 금메달 목표를 이뤘잖아요. 개인전은 금메달을 보고 나간 게 아니라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난 100% 노력형 궁사

–남자 팀 모두 고등학생 때 태극마크를 달았어요. 오진혁과 김우진 모두 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다가 슬럼프를 이겨내고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섰는데, 조언을 해주던가요.

“김우진 선수는 항상 성적 욕심을 내지 말라고 얘기해요. 결과는 노력한 만큼 나오는 것이고, 결과가 안 좋으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래요. 내가 뭘 잘못했을까라며 자책하지 말래요. 그 말을 들으니깐 부담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오진혁 선수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말해줬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재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고, 5년 후 올림픽 2관왕이 됐는데 스스로 천재성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 노력형 궁사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활을 잡았을 땐 잘 쏘지 못했어요. 근데 10점 쏠 때 느끼는 쾌감 때문에 양궁이 재미있었고, 훈련도 즐겁게 했어요. 좋은 감각과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이 쐈어요. 중학생 땐 하루 1000발 이상 쐈어요. 어릴 때 레고를 하면 완성할 때까지 안 잤어요. 하나에 꽂히면 파고들어 끝을 봐요. 이런 식으로 하나둘 이루면서 긍정적인 성격이 생겼고 양궁에도 도움이 됐죠.”

–활을 아주 빨리 쏘던데요. 무슨 생각 하면서 쏘나요.

“그렇게 쏴야 잘 맞아요. 바람의 영향도 적게 받고요. 자신감 갖고 편한 마음으로 쏩니다. 잘못 쏴도 9점이라고 생각해요.”

◇격리 풀리면 할머니께 인사

–자가 격리가 끝나면 맨 먼저 뭘 하고 싶나요.

“다음 달 세계선수권에 나가야 합니다. 훈련 못 할까 봐 걱정했는데, 양궁 훈련장에 가는 건 허락받았어요. 대신 다른 선수와 시간대를 달리해 훈련합니다. 세계선수권에서도 단체전 금메달 따고 싶어요. 격리가 끝나면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부터 찾아뵙고 금메달 보여 드릴 겁니다. 할머니는 제가 양궁을 시작할 때부터 사랑으로 키워주셨어요. 그다음 할아버지 산소를 둘러본 후 아버지를 뵐 거예요. 친구들과 떡볶이도 먹으러 가고 싶어요.”

–작년 초부터 아버지가 편찮으셨죠. 평소 상금 받으면 아버지 위해서 건조기나 세탁기도 샀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포상금이 꽤 될 텐데.

“올림픽 기간에도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아버지께 당부했어요. 다행히 학교 코치님이 집에 들러 아버지 식사 등을 챙겨주셔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집에 있는 에어컨이 10년 정도 됐어요. 아버지가 시원하게 지내실 수 있게 에어컨을 사려고 해요. 나머진 저축할 겁니다. 제 나이에 차를 살 것도 아니고요.”

◇공정 경쟁, 한국 양궁의 힘

한국 양궁이 올림픽 때마다 좋은 성적을 내는 배경에는 대회 직전 경쟁을 통해 실력 좋은 선수를 공정하게 뽑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대한양궁협회는 작년 3월 코로나 사태로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자, 올림픽 대표를 새로 뽑기로 했다. 2020년 대표로 선발된 선수도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2020년도 대표 선발전에 나갔다가 어깨 부상으로 기권했던 세계 랭킹 200위권 김제덕(현재 110위)도 기회를 잡았다. 양궁협회는 혼성전 출전 선수를 정할 때도 원칙을 지켰다. 지난 23일 올림픽 랭킹 라운드(예선)에서 가장 잘 쏜 사람을 보내기로 했고, 남녀 1위에 오른 대표팀 막내 김제덕과 안산이 혼성전에 나섰다.

–랭킹 라운드 직후 팀 분위기가 어땠어요.

“당연히 형들이 혼성전 뛸 거라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랭킹 라운드에 나섰는데 1등을 한 거예요. 막상 제가 혼성전에 나가게 되니까 눈치를 좀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형들이 오히려 먼저 다가와서 축하해줬어요. 제가 잘 쏴서 기회를 얻은 거니깐 부담 없이 자신감 갖고 경기하라고 하더라고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얘기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감동했어요. 아, 이게 팀워크구나, 한국 양궁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성전 금메달 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땐 ‘나를 응원해준 형들의 꿈(남자 단체 우승)을 같이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남았다’며 버텼어요. 개인적으론 혼성전 대표 선발 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요. 경기 직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가 출전해야 자신감을 갖고 경기를 잘할 수 있어요. 물론 제가 혼성전에 나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 선발전을 치르면서 뭘 느꼈나요.

“정말 공정하게 진행되고 승부 세계엔 항상 냉정함이 따른다는 걸 봤어요. 활을 안 쏠 땐 형이라며 농담을 주고받던 선배 선수들이 사대(射臺)에만 서면 ‘적’이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더라고요. 어려도 잘 쏘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떨어지면 깨끗하게 부족한 걸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김제덕의 마지막 말이 울림을 주기 위해선 한국 양궁이 보여준 공정 시스템이 우리 사회 다른 곳에서도 작동해야 한다. 17세 고교 궁사가 어른들에게 던진 숙제다.

☞김제덕

2013년 경북 예천초 3학년 때 친구가 ‘한번 해보라’고 해서 활을 들었는데 재미를 느껴 양궁을 시작했다. 2년 후 전국대회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김제덕은 쉬는 날 친구들과 축구,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한다. 친구들 얘기로는 양궁 빼면 다른 건 금메달감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뭘 하든 이기려고 열심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