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하고 화려한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가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즈음 당시 플랑드르 지역 알스트의 성(聖) 로크 형제회에서 주문받은 제단화다.
14세기 초 프랑스 몽펠리에 총독의 아들로 태어난 성 로크는 신분을 숨기고 로마로 순례를 떠나 몸을 아끼지 않고 병든 자들을 보살피며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다 마침내 자신도 병을 얻었다. 도시에서 쫓겨나 홀로 병마와 싸우던 성 로크 주위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개 한 마리가 나타나 매일 빵을 물어다 먹이며 상처를 핥아줬다고 한다. 건강을 되찾은 성 로크는 몽펠리에로 돌아갔다가 스파이라는 모함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고귀한 신분을 숨긴 탓에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성인전인 ‘황금 전설’에 따르면, 성 로크의 마지막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 신께서 그를 흑사병 환자의 수호성인으로 인정하신다는 금빛 서판(書板)을 머리맡에 뒀다고 한다. 중세 이래 주기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던 유럽에서 성 로크는 공식 시성(諡聖) 전부터 병든 자들의 숭배를 받았다.
루벤스의 그림에서는 충성스러운 개와 함께 감옥에 갇힌 성 로크 앞에 예수께서 천사를 대동하고 직접 나타나셨다. 눈부시게 빛나는 서판, 강렬한 예수의 붉은 옷, 힘차게 휘날리는 천사의 옷자락은 루벤스의 화려한 표현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계단 아래 어두운 곳에서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여 죽음을 기다리던 환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불어넣는 건 신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멍울이 올라온 성 로크의 다리와 예수의 발에 선명히 남은 못 자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