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에서 집행 유예로 석방된 이재용 부회장이 2020년 7월 베트남으로 출국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에 다녀온지 일주일 만에 또 출장갈 만큼 왕성하게 해외 일정을 소화했지만 미국만큼은 한번도 가지 않았다. /뉴시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개월 전 재수감되기 전까지 다녔던 해외 동선(動線)엔 미스터리 같은 대목이 있다. 유독 미국만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2018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 올 연초 법정 구속될 때까지 약 3년간 활발한 해외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스웨덴에서 인도·사우디·베트남·브라질까지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를 섭렵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중국행을 강행하고 일본·유럽을 돌았다. 글로벌 기업 CEO로서 당연한 활동이었다. 그런데 미국만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이웃한 캐나다도 두 차례나 출장 갔으면서 미국은 피했다. 국정 농단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합치면 5년 가까이 미국에 발길을 끊었다.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국가를 빼놓은 것이다.

삼성전자의 공식 설명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회사 측에 문의했더니 “이 부회장은 사업상 갈 필요가 있는 곳을 갈 뿐”이라고 했다. 납득되지 않는 설명이다. 삼성에 미국은 절대적인 시장(市場)이자 경영 자원의 보급지다. 삼성전자의 해외 매출은 90%에 달하고 그 태반이 미국 매출이다. 주요 고객과 전략적 제휴 파트너가 대부분 미국에 있다. 최첨단 트렌드를 흡수하는 연구개발 기지도 실리콘밸리에 지었다. 삼성에게 미국은 핵심 기술과 일류 인재와 혁신 역량을 공급받는 원천이다. 미국 없는 삼성전자는 성립하기 힘들다. 그런데 삼성 총수가 전 세계를 돌면서도 미국만 안 간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부회장은 비즈니스의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5년 전 특검 수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수시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현지에서 고객사들을 만나고 비즈니스 딜을 진두지휘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애플과의 특허 분쟁도 그가 팀 쿡(애플 CEO)을 만나 톱 다운으로 담판 지었다. 9조원을 투자한 ‘하만’ 인수도 그가 미국 가서 직접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한사코 미국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 부회장이 밝히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 도리는 없다. 다만 삼성 주변에서 나오는 비공식 해석은 이랬다. 미국은 범죄 관련자에 대한 입국 제도가 까다롭다. 범죄 전력이 있는 여행자가 입국 때 불이익당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이 부회장은 뇌물공여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피고인이다. 미국의 입국 심사대에서 운 나쁘게 깐깐한 심사관이라도 만나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실제로 유명인이 입국 거부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마라도나(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보이 조지(영국 보컬 ‘컬처클럽’의 리더), 대처 영국 총리의 장남 등이 범죄 경력을 이유로 미국 입국을 거절당한 일이 있다.

물론 세계적 기업인 삼성 총수가 진짜 그런 일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가능성 제로라고 할 수도 없다. 만에 하나 입국 거부라도 당하면 큰 망신이다. 삼성에 범죄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해외 평판에 악영향 줄 수 있다. 이 부회장은 전문가나 변호사 자문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리스크가 두려워 미국행을 끊은 것 아닐까. 믿기진 않지만 이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이 부회장 개인이나 일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백신 조달을 비롯한 각종 현안에서 미국 핵심층과의 파이프라인이 절실한 입장이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글로벌 인맥을 보유한 사람이 이 부회장이다. 그는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며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등과 친구처럼 지내고 부시 가문과도 친분이 깊다. 미국 정·재계에 그만큼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인물도 없다.

이 부회장은 매년 미국서 열리는 초엘리트들의 모임 ‘선밸리 콘퍼런스’의 유일한 한국인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 11년간 만사 제쳐놓고 이 행사에 개근했지만 특검 수사 이후 계속 불참 중이다. ‘세계의 그림자 정부’로 불리는 글로벌 이너서클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빠진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 부회장의 인맥 자산이 아쉬운데 정작 그는 미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

오늘 가석방되는 이 부회장이 경영 복귀한 뒤 가장 먼저 달려갈 곳도 역시 미국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려면 총수가 미국에 가서 직접 뛰는 수밖에 없다. 국가적으로도 그의 역할이 필요하다. 바이든의 ‘반중(反中) 기술 동맹’에 대비한 국가 전략을 펼치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

여권도 ‘백신 특사’ 운운하며 이 부회장의 활약에 기대를 건다. 그러면서도 사면 대신 가석방으로 때운 것은 비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가석방 후에도 이 부회장은 여전히 ‘형기(刑期) 도중의 피고인’ 신분이다. 나라를 위해 나가 뛰라고 요구하려면 그를 고민케 하는 사법적 낙인부터 풀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