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1896년 4월 고종이 미국인 호러스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에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긴 이래 조선 땅에 묻힌 각종 광물 이권은 서구 열강으로 넘어갔다. 고종 정부가 최종적으로 받은 금액은 1만2500달러였고 1939년 미국 회사가 운산에서 철수할 때까지 40년 동안 거둬들인 순익은 1000배가 넘는 1500만 달러였다. 1908년 운산금광에서 일하던 미국 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죽자 함께 일하던 맏아들 앨버트 테일러는 자기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운산을 떠나 충남 직산으로 향한다.

* 유튜브 https://youtu.be/0j8eoqMAO1Y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금광업자 앨버트 테일러와 결혼해 서울에 붉은벽돌집 딜쿠샤를 만들고 살았던 영국 배우 메리 린리 테일러.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0. 황금의 나라 조선②테일러 부부와 직산금광

요코하마에서 만난 여배우 메리

1916년 연극 공연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 왔던 영국 배우 힐다 빅스(Hilda Biggs)는 어느 날 호모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다. 메리 린리(Mary Linley)라는 예명을 쓰는 이 배우를 살려준 사람은 미국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였다. 한눈에 반한 앨버트는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고는 자기 사업장이 있는 조선으로 돌아갔다. 공연을 마친 메리는 극단 주무대인 인도로 돌아갔다.

열 달이 지난 1917년 어느 날 앨버트가 불쑥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에 나타나 청혼을 했다. 결혼, 그리고 석 달을 이어간 허니문. 목적지는 일본 식민지가 된 조선 수도 경성이었다. 경성에서는 앨버트 동생 윌리엄이 서대문 근처 한옥을 사서 벽난로를 설치한 뒤 형 부부에게 살림집으로 내주었다. 앨버트가 말했다. “7년 동안 죽도록 고생했으나, 이제 당신과 행복하리라.”

충청도의 노다지, 직산금광

1896년 운산금광이 미국에 넘어가자 조선과 수교한 모든 국가가 일제히 동일한 조건으로 채굴권을 요청했다. 조선 팔도 금 산지 가운데 충남 천안에 있던 직산 지역은 일본에 의해 채굴이 시작됐다. 1898년 8월 조선인 금광을 인수한 일본인이 채굴을 시작한 이래 직산금광은 뒤늦게 외국인 채굴을 금지한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결국 1900년 8월 16일 대한제국 궁내부는 일본 금융계 거물인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측과 직산금광 채굴권 양여 계약을 맺었다.(1900년 8월 16일 ‘고종실록’) 1907년 일본 측은 미국 자본도 끌어들였다. 채굴량이 예상보다 적자 일본 측은 1911년 미국 자본에 채굴권을 넘겼다.(에드윈 밀스, ‘조선의 금광’, 왕립아시아학회지 vol.7, 1916)

그 채굴권을 산 사람이 앨버트 테일러였다. 요코하마에서 메리를 만났을 때 앨버트는 주주를 모아 자금을 마련한 뒤 직산 땅을 매입하고 7년째 소규모로 채광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직책은 총관리인이었고 연봉은 무급이었다. 훗날 앨버트는 아내 메리에게 “대박이 나리라 확신하고 월급 대신 주식을 받았다”고 했다.

외국 자본이 개발하기 전 직산 사금광 모습. 수작업으로 금을 캤다. /서울역사박물관.

직산금광은 사금광(砂金鑛)이었다. 사금을 캐기 위해서는 물을 퍼내고 사금을 걸러내는 준설기가 필요하다. 요코하마에는 그가 주문했던 준설기가 미국에서 도착해 있었다. 그때까지 앨버트는, ‘손으로 금을 채취했고, 임금이 체불된 광부들에게 협박당했으며, 쌀을 구하기 위해 축음기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험난한 세월 7년을 보냈다고 했다.(메리 테일러, ‘호박목걸이’, 책과함께, 2014, p115) 채산성을 낮게 봤던 일본 예상과 달리 직산은 운산⋅수안 금광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미국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금광이 되었다.(에드윈 밀스, 앞 논문)

테일러 부부의 엘도라도, 조선

미국 네바다에는 버지니아 시티가 있다. 미국 골드러시가 불었던 대표적인 금광촌이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도 노다지를 따라 와서 쫄딱 망한 뒤 버지니아시티에서 기자가 되고 소설가가 됐다. 앨버트는 이 금광촌 한 갱도 입구에서 태어났다.

금맥을 노리는 금광업자에게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리에 따르면, 운산금광 시절 테일러 부자는 크리스마스와 미국 독립기념일 이틀 외에는 쉬지 않았고, 훈제 청어와 양고기 통조림으로 몇 달을 버텼다고 했다. 7년을 그렇게 버티던 광부 아들 앨버트가 이제 자기 남편이 된 것이다. 그것도 광산을 소유한 성공한 사업가로.

메리가 ‘조선에서 만난 미국인 가운데 가장 금광꾼 인상에 걸맞은 거구(巨軀)’라고 했던 시동생 윌리엄은 광산을 떠나 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 옆에서 수입잡화상을 운영했다. 윌리엄이 운영한 잡화상은 타자기며 축음기며 온갖 진귀한 서구 물품을 팔았다. 그 돈으로 형과 형수는 안락한 신혼집을 차렸고, 형은 직산을 오가며 금을 캤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윌리엄은 ‘뉴욕 헤럴드’지 통신원으로 일하며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다.(윌리엄 테일러, ‘조선의 도로, 과거와 현재’, 왕립아시아학회지 vol.15, 1924) 형 앨버트는 1919년 고종이 죽자 AP통신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통신원으로 고용됐다. 눈부신 본업은 물론 지적인 부업까지, 조선은 그들에게 엘도라도였다.

직산 광부들의 다양한 삶과 김봉서

앨버트가 들여온 사금 채취용 준설기를 사람들은 ‘금배’라고 불렀다. 금을 낳는 배라는 뜻이다. “금배로 성환천 위아래를 훑으며 쉴 새 없이 바닥을 파젖혔다. 금배가 엉금엉금 기면서 논바닥을 밀고 내려가면 도랑이 생기곤 했는데, 그때 만들어진 도랑이 오늘날 성환천(成歡川)이 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직산 주민 이흥규 구술, ‘직산금광과 금배’, 충남-잊혀진 시간을 말하다’2, 충남문화원연합회, 2020, p86~87) “금을 캐고 남은 흙더미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흙을 나무 함지로 일어내면 또 금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을 ‘거랑꾼’이라고 했다. 그런데, 덜 캔 흙더미를 파오다가 매를 맞는 거랑꾼도 많았다.”(황서규 구술, ‘직산 사금 이야기’, 앞 책 p109~114)

미국인 테일러 측이 금광을 인수하고 직산 양대리 금광촌에는 여학교가 생겨났다. 전기도 들어오고 주점은 물론 유곽도 들어섰다. 그리고 1922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순식간에 직산 양대리는 조락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과 함께 금값 상승으로 황금광 시대가 다시 열렸을 때, 금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이 직산을 찾았다. 훗날 정치가가 된 전 연희전문 교수 조병옥은 고향 천안에 내려와 금맥을 찾았고(‘광산하는 금광신사 기’, 삼천리 1938년 11월호), 소설가 채만식도 직산에서 덕대(소규모 광산주)로 일했던 형들을 따라 직산을 뒤졌다. ‘의사는 메스를 집어던지고 변호사는 법복을 벗어 던지고 기생이 영문도 모르고서 백오원을 들여 금광으로 달려가던’ 시대였다.(채만식, ‘금과 문학’, 1940,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출판, 2005, p36, 재인용)

직산금광에서 큰돈을 벌어 덕을 쌓은 덕대 김봉서 시혜기념비. 천안 부대마을 입구에 있다. /박종인

직산에서 덕대로 일하던 김봉서는 호인(好人)이었다. 사금으로 큰돈을 번 김봉서는 그 돈 가운데 상당액을 직산에 내놓았다. 직산 주민들은 1938년 부대동에 ‘김봉서공 시혜기념비’를 세웠다. 김봉서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조카 김종희를 도와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화약회사에 취직을 시켜줬다. 해방 후 김종희가 그 회사를 불하받아 창업한 기업이 현재 한화그룹 모태다.(임명순 구술, ‘직산 금노다지와 한화그룹과 미국 남장로회’, 충남문화원연합회 앞 책, p115~120)

직산금광 만세 사건과 특파원 앨버트

1919년 3월 20일 직산금광에서도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금광 광부 안시봉이 미국인이 만든 광명여학교 교사, 학생, 광부 70여 명을 지휘해 양대리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28일에는 광부 200여 명이 갱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벌였다. 조선 팔도를 뒤흔든 기미년 만세 운동이다.

그런데 그해 2월 28일 당시 경성역(현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서 테일러 부부 아들 브루스가 태어났다. 문득 보니, 아기 요람 아래에 내일 조선 민중이 읽을 독립선언서 몇 장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닌가. ‘AP통신 기자’ 앨버트는 선언서를 숨겨 나왔고, 선언서는 역시 러일전쟁 종군기자였던 동생 윌리엄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윌리엄은 이를 전신으로 미국에 타전했고, 조선의 의지가 서방 세계에 보도됐다. 4월 15일 경기도 수원 제암리 감리교회 학살 사건 또한 기자 앨버트 테일러에 의해 보도됐다.

1923년 테일러 부부는 신혼집 옆 늙은 은행나무가 있는 공터에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를 짓고 살았다. ‘마음속 기쁨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 집에는 집 이름을 새긴 초석이 붙어 있다. 이들이 잠시 미국에 머물던 1926년 여름 벼락이 떨어져 딜쿠샤가 전소됐다. 3년 뒤 돌아와 보니 앨버트 동생 윌리엄이 집을 감쪽같이 새로 만들어놓았다. 부부는 1942년까지 딜쿠샤에 살다가 태평양전쟁 직전 미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광산 기술자의 아들이자 광산 업자, 사명감 가득한 저널리스트 가족과 조선은 그렇게 작별했다.

1923년 테일러 부부가 서울 행촌동에 짓고 살았던 붉은벽돌집 딜쿠샤 초석. /박종인

직산광업회사와 앨버트의 귀환

앨버트가 주주들과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 이름은 직산광업회사(Chiksan Mining Company)였다. 조선에서 철수한 직산광업회사는 1923년 4월 시추회사로 업종을 바꿨다. 상호(商號)는 ‘직산’을 유지했다. 본부는 캘리포니아 풀러턴에 차렸다. 1928년 직산공구회사(Chiksan Tool Company)로 또 변경한 이 회사는 채굴과 시추에 필수 불가결한 ‘새지 않는’ 파이프 이음쇠를 개발했다. ‘직산 스위블 조인트’라 명명된 이 이음쇠는 1940년대 이미 350여 모델이 나와 시장을 점령했다. 1942년 직산공구회사는 새 주인에게 인수돼 ‘직산회사(Chiksan Company)’로 개명됐다. 직산회사는 지금 프랑스-미국 합작 ‘테크닙FMC’에 흡수됐지만 ‘직산(CHIKSAN)’이라는 브랜드는 변함이 없다.

1948년 6월 앨버트가 죽었다. 앨버트는 자기를 아버지 조지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해 9월 아내 메리가 남편 유해를 들고 한국에 왔다. 양화진에 남편을 묻고, 딜쿠샤에 들렀다가 그녀가 돌아갔다. 그리고 2006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아들 브루스가 딜쿠샤를 찾았다. 독립선언서를 일본으로 가져갔던 동생 윌리엄은 1951년 죽었다. 캘리포니아 알라메다 카운티 마운틴뷰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아버지 앨버트가 어머니 메리에게 결혼 선물로 줬던 호박목걸이는 지금 딜쿠샤에 있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 있는 조지(앞)와 앨버트(가운데) 테일러 부자 묘지./박종인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보도한 금광업자, 기술자, 그리고 기자 앨버트 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