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태영호(현 국민의힘 의원)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가 망명했을 때 아내 오혜선(55)씨도 화제가 됐다. 오씨가 북한 최고 금수저인 ‘항일 빨치산 가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오씨의 작은 아버지 오백룡(1984년 사망)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이자 노동당 군사부장을 지냈고, 오씨의 부친은 북한군 고위 정치 장교를 양성하는 김일성정치대학장 출신이다. 이런 배경을 업고 오씨도 젊은 시절 대외경제성에서 영어 통역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했다. 하지만 오씨는 망명 후에는 남편과 달리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남편이 총선에서 당선됐을 때 잠시 카메라에 잡힌 게 다다. 그런 그와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15일 연락이 닿아 만났다. 최근 이화여대에서 ‘북한의 대남 비난 행태’를 분석한 석사 논문을 쓴 오씨는 “앞으로는 북한 실상을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다만 아직은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스럽다며 마스크를 낀 채 촬영에 응했다.
북한에서는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고 들었다.
“군관(장교)인 아버지가 함경북도 나진에서 근무할 때 태어나 한 달 후 평양으로 올라가 쭉 살았다. 1989년 평양외대 영문과 졸업반 때 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에 학생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방북한 임수경씨를 먼발치에서 봤다. 당시 북한에서 세계보건대회도 열렸는데 최선희(현 외무성 제1부상)씨가 외무성 대표단 단장, 내가 대학생 단원으로 함께하면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무역성에 입사해 아시아·아프리카 대외 무역 업무를 담당했다.”
북한에서 빨치산 가문이면 어떤 혜택을 받나.
“예전엔 빨치산 가문이면 사회적으로 감싸주고 내세우는 분위기였다. 빨치산 계열과 남조선 혁명가(남파 간첩), 애국 열사, 6·25 희생자 가족은 친손자까지 대학 입학이나 직장 배치 등에서 가산점을 준다. 하지만 북한도 배경만 우선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북한에서 충분히 혜택받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망명했나.
“어렸을 때부터 특혜를 받았고, 남다른 긍지와 기대를 안고 성장했다. 그랬기 때문에 망명을 결심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북한에서 보낸 삶은 빨치산 가문이라고 해도 처우가 좀 낫다 뿐이지 결국 김씨 일가에 복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노예들이다. 북한에 돌아가면 자식들도 다 노예가 되는 것인데, 애들만큼은 자유롭게 키워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남편과 오랜 시간 논의해 결심했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하면서 망명 생각이 더 굳어졌을 것 같다.
“남편을 따라 영국 8년, 스웨덴 2년, 덴마크 2년 정도 살았다. 처음 덴마크에 갔을 때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다. 사람들도 따뜻하고, 복지도 잘돼 있었다. 그리고 북한에 왔는데 너무 한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 때문에 우리도 언젠가는 좋은 시절이 오겠구나 하는 희망이 있었는데, 갈수록 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추위에 굶주림에 떨고 있었다.”
북한에도 그 나름대로 복지 시스템이 있지 않나.
“있지만 엉망이다. 중앙의 공급이 많이 줄어들고 생활 기반이 약해졌다. 북한에도 연로 보장 제도도 있지만 무용지물이다.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의 월급도 환율로 따지면 휴지 쪼가리에 불과한데, 은퇴한 사람들은 어떻겠나. 저희 부모님도 예전엔 ‘연금이 나오니까 너희 신세 안 진다’ 했는데 그게 한 달에 1달러도 안 됐다. 전기가 제대로 안 들어오니 변전소 사람들이 갑질하는 세상이 됐다. 그들에게 뇌물을 줘야 전기를 쓸 수 있다.”
오씨는 김정은이 처음 전면에 등장했을 때 잠시 개혁과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철저한 비밀주의, 비공개주의로 일관했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이 부인 리설주를 공개하는 모습 등에서 신선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김정은이 된 이후 당세포(말단 기층 조직) 조직 생활에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세포 비서들이 당원들을 달달 볶더라. 회의를 계속하고, 당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건설의 대부분이 국가 투자가 아니라 과제를 강제로 할당하고 빨아내는 수탈적 방법으로 이뤄졌다. 김정은이 50대 이상은 쓰지 말라며 경험을 가진 노장은 다 집에 돌려보냈는데, 지도자 본인도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인데, 국가의 한 세대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바로 설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이 먹은 장성들을 훈련시킨다며 바다로 내몰아 수영 훈련을 시키는 것도 충격이었다. 저렇게 잔인한 사람에게 내 자식들을 맡겨야 하나, 우리가 또 몇 십 년을 그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북한 고위층도 김정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할까.
“북한 고위층 중 김정은이나 지금 체제에 진심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권력 계층이나 지식인 계층이나, 시장 장사꾼 모두 생존 경쟁을 할 뿐이다. 먹이사슬 구조에서 위력에 따라 사람들이 움츠리고 있을 뿐이지, 이제는 진심으로 국가를 인정하거나 충성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회에서 다른 의미 있는 변화는 무엇이 있나.
“남한처럼 인문계가 몰락하고, 이공계가 대세가 된 것이다. 혁명 역사, 사회과학, 철학 등 정치 계열 전공은 기피 대상이 됐다. 이들은 간부는 될 수 있지만 먹고살기 힘들다. 반면 IT·전기·건설·기계·수학·화학·디자인 등 이공계는 안정적이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외국어도 보조적 수단이지 이공계를 전공해야 북한에서도 먹고살 수 있다. 그래서 북한에 있을 때 애들한테 피아노 레슨과 수학 과외를 받게 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드라마가 인기라는데 어느 정도인가.
“영국에서 한국인들이 사는 뉴몰든에 가서 처음 한국 드라마를 빌려 봤다. 처음 본 게 ‘별에서 온 그대’였는데 어찌 그리 재밌던지…. 그다음부터 ‘가을 동화’ ‘파리의 연인’ ‘하버드에서의 사랑’ ‘장밋빛 인생’ 등을 봤다. 소환장을 받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가기 전날까지 ‘깍두기’라는 드라마에 빠져있었는데, 남편이 ‘흔적을 싹 다 없애라’고 해서 아쉬웠다. 북한에 들어갔을 때는 해외 출장 다녀오는 친구들에게 부탁해 한국 드라마를 몰래 봤다.”
한류가 북한 주민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보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스트레스가 없어졌고, 남한의 발전상을 알게 됐고 왜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북한 사람들은 생일이면 국수를 먹었는데 드라마 보고 미역국 먹는 문화로 바뀌었다. 결혼식 때 여자들이 입는 한복 같은 것도 개량됐다. 과거 북한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동경했는데 드라마 영향으로 남한이 우선순위가 됐다. 그러니 북 정권이 지금 한류 금지령도 내리고 하는 것 아니겠나.”
2018년 5월 남편인 태영호씨의 자서전이 발간됐을 때 북한이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그것 때문에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나와야 했다.
“속상했다. 아직 사회 안착도 안 됐는데 남편한테 ‘어떻게 먹고살려고 이러냐’고 했더니 남편이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그냥 믿었다. 항상 남편은 실망시킨 적이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항상 고맙다.”
한국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탈북민 지원 정책이 잘돼 있고, 많은 분이 북한에서 왔다고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조금 문제라 하면 달라진 환경에서 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것도 내가 극복해야 할 문제기 때문에 괜찮았다. 일부 문화적 충격은 있었다. 소비 문화, 외식 문화에 특히 놀랐다. 북한에서는 외식이라는 것이 거의 없는데, 매번 밖에서 식사하고 커피 마시는 게 신기했다. 오히려 집에서 식사할 일이 별로 없어서, 남편이 국회의원 당선되기 전에는 집에서 도시락을 만들었다. 하루에 한 끼는 그래도 집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되고 나서는 일정이 너무 달라 어렵고 가능한 한 주말만은 식사를 집에서 하기로 했다.”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선거 당일에 전화만 돌리고 별로 도움이 못 됐다. 내 위치에서 남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남편에게 짐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배우고 있다. 자식들에게도 어머니로서 한국 사회 정착에 본보기를 보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대학원에 다니고 논문을 썼다. 북한 정권과 주민을 구분해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사막에 뿌려진다 해도 우리는 일어나자’가 우리 가족의 가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