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위원회가 8월 5일 탄소중립 시나리오 초안을 공개할 때 “반드시 가야 할 길인 만큼 소요 비용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았다”고 했다. 언론이 물어본 것도 아닌데 굳이 발표문에 그런 설명을 넣었다. 지난번 칼럼에서 ‘2050 탄소중립안을 짜면서 비용은 생각도 안 해봤다니’라는 제목으로 그걸 비판했다. 그후 며칠 안 돼 위원회가 사실은 비용의 핵심 요소를 뽑아놓고도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태양광·풍력의 출력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한 전력저장장치(ESS) 비용이 787조~1248조원 드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액수다. 또 저장장치 부지로만 여의도 48~76배 땅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걸 계산해놓고도 “안 따져봤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겁이 나서도 이렇게 정반대로는 말을 못 한다.
탄소중립위원회가 조만간 2030 중기 계획과 2050 장기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걸 앞두고 지난달 28일 위원회가 준비했던 기업 간담회가 무산됐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의 청년 회원들이 나타나 “기업들이 탄소중립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점거 시위를 벌였다. 이어 30일엔 민간 위원 77명 중 종교단체 위원 네 명이 “탄소중립의 근본 목적에 충분치 않게 논의가 흐르고 있다”며 사퇴했다. 앞서 기후행동가 두 명도 사퇴했다. 시민단체와 종교계가 더 강한 목표를 채택하도록 위원회를 압박하는 분위기다. 30일 열린 기후변화학회 토론회에 나온 윤순진 탄소중립위원장은 청년들 시위에 대해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의견 수렴 행사를 망친 사람들에게 위원장이 고맙다고 했다.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했던 표현을 쓴 점도 특이했다.
탄소중립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이뤄야 하는 절대 가치는 아닐 것이다. 탄소중립위원회의 학습 과정을 거친 시민참가단조차 84%는 “삶의 질 유지, 혜택 수준만큼만 탄소중립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답했다. 정부가 자원의 최적 배분으로 국가 목표들 사이의 조화를 취해야 한다. 최소 비용, 최소 환경 부담으로 최대 효과를 낼 길을 찾아야 한다. 기후 문제는 어느 한 나라만의 책임도 아니다. 냉정하게 국익과 세계 이익 사이에서 균형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위원회가 국가 에너지 전략을 짜면서 비용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책임한 자세였다. 국민에게 무슨 피해가 돌아가더라도 밀고 나가겠다는 것 아닌가. 윤 위원장은 30일 토론회에서도 “탄소중립은 우리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맥락의 얘기였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윤 위원장 스스로 강조했듯, 위원회는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부 기구다. 법에 의해 권위와 책임을 부여받았다. 다양한 견해를 반영해 실현 가능한 국가 에너지 계획을 설계해야 하는 조직이다. 집행부 생각과 다른 데이터가 나왔다고 이를 묻어버린다면 위원회를 무엇 하러 만드나. 몇 사람이 그냥 정해버리는게 낫지 않겠는가.
위원회는 잘만 운용하면 정부를 보완하면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공무원 조직은 능력과 효율을 갖췄지만 허점이 있다. 책임자가 생각을 굳혀버리면 교정하는 것이 어렵다. 장관이 과장에게 “너 죽을래”라고 협박하지 않는가. 반면 위원회 위원들은 생계를 따로 갖고 있고, 공익에 기여한다는 대의로 일시 모인 사람들이다. 대통령이 뭐라건, 장관 생각이 뭐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위원 구성부터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탄소중립위원회는 과도하게 시민단체 위주로 구성돼 있다. 청와대가 위원 구성을 주도했다고 한다. 권력과 생각이 다른 쪽 목소리를 반영할 공간을 열어놓지 않았다.
원자력의 온실가스 배출이 태양광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탄소중립 하자면서 원자력 전문가는 한 명도 끼워넣지 않고 무슨 논의를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해놓았다. 시민단체·종교계 위원들의 연쇄 사퇴나 간담회 방해 시위도 위력 행사 같은 느낌을 준다. 시민단체는 흔히 내 생각만이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돌진하는 근본주의 오류에 빠지곤 한다. 탄소중립위원회가 절차적 일탈은 가볍게 보는 시민단체처럼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이명박 정부 시절 칼럼에서 ‘녹색 세탁(green wash)’이란 용어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당시의 ‘녹색 뉴딜’ 정책을 비판하면서 썼던 말이다. 녹색이 아닌 것에 녹색을 덧칠해 녹색인 것처럼 눈가림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탄소중립위원회 운영은 ‘민주성 세탁’ 작업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다양한 견해를 반영하겠다고 해놓고서, 실제론 의견 수렴 절차를 장식으로만 두른 채 정해놓은 결론으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