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회>
한국의 성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국인의 심리
2002년 여름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때 나는 중국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지방에서 역사 현장 답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 대표단이 16강, 8강에 진입한 후, 급기야 이탈리아를 꺾고 4강에 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이 홈그라운드에서 심판을 매수했다며 비분강개했다. 한 지방 신문엔 “무치일로(無恥一路, 부끄럼 없는 한 길)”란 큰 제목 아래 한국이 부당하게 편파적으로 경기를 운영한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중국 공영 방송의 한 앵커는 “한국에 가봤더니 화장실 사용할 때 돈을 받더라!”는 현실성 없는 멘트를 내뱉으며 “한국인들이 쩨쩨하다(小氣)”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중국에 갈 때마다 다양한 부류의 중국인들로부터 월드컵 4강 진출할 때 한국이 심판 매수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중국인들이 쉽게 한국의 약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한(漢, BC 206- AD 202) 제국 이래 견고하게 뿌리내린 중화 중심주의 조공 체제의 유습이라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로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기 전까지 중국이 한반도를 대대로 지배하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 변방에서 중화제국을 보위하던 작은 번국(藩國, 울타리 나라)이 세계적 국가로 발돋움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심리다. 북한처럼 가난에 허덕이며 중국에서 기름을 받아가며 연명해야 당연하다 생각하는 걸까?
“56개 민족 15억 인구가 단일한 ‘중화민족’을 이룬다”
한 중국학자는 사석에서 내게 “한국은 작은 나라일 뿐”이라고 퉁명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인구로 보면 한국은 세계 193개 국가 중 28번째로 큰 나라다. 상식적으로 한국이 작은 나라가 아니라 중국이 특별히 지나치게 커다란 나라일 뿐이다. 중국의 총 인구수는 세계 전체 인구의 18.47%에 달한다. 이 세상 사람들 다섯 명 중에 거의 한 명꼴로 중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또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실로 중국은 세계사에 유래 없는 극히 예외적인 비대한 대륙국가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총인구 14억 5천만 명과 5천만 해외 중국계 인구를 모두 합해서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중화민족”은 한족(漢族), 위구르족, 티베트족, 몽골족, 조선족, 장족, 먀오족 등등 중공 정부 공인의 56개 민족들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중공 정부의 표현을 빌면, “중화민족엔 56개 민족들이 있다.” 56개 각기 다른 민족들이 모여서 어떻게 단일의 “중화민족”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일찍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통일된 국가에서 장시간 살게 되면 다양한 민족들이 결국 혼융되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국족(國族)”을 이룬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문화, 다인종, 다언어의 유럽, 북아메리카, 아프리카도 한 나라로 통일되면 결국 “유럽민족,” “아메리카민족,” “아프리카민족”을 이룬다는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 속엔 청제국의 모든 영토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민족의 중국을 단일한 민족국가로 재건하는 묘책이 깔려 있었다. 량치차오가 발명한 “국족” 개념은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민족”으로 구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당이라면서 “위대한 중화민족 부흥” 부르짖어
2021년 7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선 오전 8시부터 두 시간에 걸쳐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광장엔 전국에서 초청장을 받고 몰려온 수만 명의 공산당원과 행사에 동원된 젊은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착석해 있었다. 팬데믹의 상황에서도 광장의 군중 중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념식 시작 후 20분 쯤 지났을 때, 중국공산당의 핵심 지도자들이 톈안먼 성루(城樓)로 걸어 나왔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총서기이자 국가주석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성루에 선 영도자들은 맨 얼굴을 드러냈지만, 지근거리서 취재하는 기자단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늘에 수대의 헬기가 떠오르고 장엄한 열병식이 거행된 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강설(講說)”이 시작됐다. 정면을 응시한 채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시진핑은 느릿느릿 연설문을 낭독했다. 그의 강설은 무려 1시간 5분 동안 이어졌다. 200자 원고지 40장에 달하는 긴 글이었다.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70-80매는 족히 넘을 분량이었다.
2019년 6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전 조직을 대상으로 이른바 “주제 교육운동”을 벌였다. 그 주제란 바로 “불망초심 뇌기사명(不忘初心牢記使命,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심하자!)”였다.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그 초심을 내내 강조했는데, 그 초심은 다름 아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 단정했다.
마르크스는 “계급소멸의 합법칙성”을 주장했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렸고, 마오쩌둥은 한 평생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千萬不忘階級革命!)”를 부르짖었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이념의 기둥으로 삼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을 자임하고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진실로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었나? 시진핑은 무슨 근거로 중국공산당의 초심이 “중화민족의 부흥”이라 주장하고 있나?
중국은 공산당이 만든 ‘당 국가’...당초 제1강령은 “계급 투쟁”
1921년 7월 23일부터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서 일주일 간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조차구)에서 제1차 대표대회를 열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대표로 참석한 인원은 마오쩌둥을 포함해 13명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두 명의 코민테른 참관 요원이 현장에 있었다. 당시 전국 및 재외 당원 수는 다 합쳐야 고작 57여명에 불과했다. 대회 마지막 날 폐회식은 조계 경찰을 피해 저장(浙江)성 자싱(嘉興) 난후(南湖)의 선상에서 폐막식을 열 수밖에 없었다.
중국공산당의 시작은 그만큼 불안하고도 미약했다. 그 후 100년의 세월 동안 중국공산당은 9500만 명의 열심 당원을 자랑하는 명실 공히 세계 최대 규모의 막강한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중국공산당을 어느 나라에나 있는 그저 일개 정당이라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민주 국가의 정당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은 무장집단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투로 관할 지역을 넓혀가고, 급기야 내전을 거쳐 전 영토를 점령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당이 군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 그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이 만든 당-국가(party-state)이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일당독재의 지배체제를 유지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1921년 7월 말 성립된 중국공산당의 초심은 무엇이었나? 러시아어로 작성해서 공표한 중국공산당 제1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1. 혁명군대는 반드시 자본가 계급의 정권을 전복하고 노동자 계급을 지원하며, 사회 계급의 구분이 소멸되면 해산한다.
2. 계급투쟁을 종식하고 사회적 계급 구분이 소멸될 때까지 무산계급독재를 승인한다.
3. 자본가 사유제를 소멸하고 기기, 토지, 공장 및 반제품 생산 자료(資料) 모두를 사회 공유로 귀속한다.
4.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제3국제(코민테른)”와 연합한다.
950자 남짓한 중국공산당 제1강령의 키워드는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 계급의 철폐”이다. 그 어디에도 “중화”나 “민족” 같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이 제창한 공산주의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공산당의 궁극적 목적은 사적 소유의 폐지, 착취구조의 혁파, 계급모순의 철폐를 통한 공산 유토피아의 건설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에 입각해서 1921년 중국공산당은 계급 철폐와 사적소유제 폐기, 국제 연대, 공산주의 실현 등을 창당의 목적으로 삼았다.
물론 동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민족주의를 배제하고선 이해될 수 없다. 1920-40년대 중국공산당은 크게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투쟁했다. 1917년 레닌은 그 유명한 <<제국주의론>>에서 구미의 부르주아 자본주의 민족국가(nation-state)들이 내부의 계급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 식민지를 건설해 저개발 지역 인민들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명쾌한 설명에 감복한 1920-30년대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야말로 민족모순을 해결하는 근본적 대안이라 믿고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적어도 공산당원들 사이에선 계급의식이 민족의식에 우선했다.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정당으로 출발했다.
빈부 격차 벌어지고 자산 계급 등장하면서 “인민” 대신 “중화민족” 강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 민족의식을 심어 계급모순을 약화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위기의식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외쳤다. 민족주의의 음모에 빠지지 말고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촉구했던 것. 부르주아지는 계급모순을 감추기 위해 민족적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민족의식을 해체하고 국제적 연대를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50-60년대 마오쩌둥도 민족모순보단 계급모순을 더욱 부각시켰다. 문화혁명 당시엔 “중화민족”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중국인의 범칭으로는 “중국인민”이나 “각 민족” 등의 용어가 더욱 상용됐다. 문혁의 정신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계급투쟁”이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 서거 후 중공 정부는 점점 “중화민족”이란 용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의외로 쉽게 설명된다. 1978년 이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본격적인 자산계급이 등장했다. 세계 제2위 경제규모를 자랑하지만, 월수입 미화 140불 이하의 극빈층이 6억 명, 인구의 40%에 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공 정부는 “중국인민” 대신 “중화민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의 표현을 빌면, 계급모순을 감추기 위해 민족모순을 부각시키는 전략이다.
100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의 계급정당에서 “중화민족”의 민족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중화민족”은 다민족의 대륙에 “민족국가”로 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고안한 비자연적, 비과학적, 비논리적 정치 언어다. 그럼에도 “중화민족”은 놀라운 정치적 효력을 발휘한다. 다민족의 대륙을 “단일 종족(single ethnicity)”의 “민족국가(nation-state)”로 뒤바꾸는 정치 마술의 주문(呪文)과도 같다.
“중화민족”을 전면에 내세워 중국공산당은 유엔헌장에 명시된 인류적 보편가치를 부정한다. 오로지 중국만의, 중국 특색의, 중화주의의 특수 가치를 선양할 뿐이다. 그 결과 “중화민족”이 인류에서 분리되고, 인류와 충돌하고 있다. 중국 밖의 전 세계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우려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