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0회>

<2012년 8월 중국의 SNS 신랑(新浪)에 90분간 올라와 있다가 곧 삭제된 사진. 푸젠성의 “약세(弱勢, 소수) 집단이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의미로 행한 행위예술이다. 이들이 쓴 모자에는 ”새로운 흑오류(黑五類) 분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화혁명 당시 ”흑오류“는 지주, 자산가, 반혁명분자, 악랄분자 및 우경분자를 가리켰는데, 2012년 당시 중국에선 인권변호사, 지하 교회 및 여타 종교 활동가, 반체제인사, 온라인 활동가 및 사회적 소수자를 의미한다. 사진/ https://twitter.com/xinceng34 >

디지털 시스템 발달로 더욱 심해지는 독재의 억압 구조

다양한 생각, 다원적 가치가 공존하는 열린사회냐? 획일적 이념, 일원적 가치가 지배하는 닫힌사회냐? 인류에겐 여전히 그것이 문제이다. 오늘날도 인류의 18.47%, 거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획일적 이념과 마오쩌둥 사상의 일원적 가치를 강요하는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대민 통제와 인권 탄압이 디지털 시스템의 발달에 힘입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계에선 이미 2002-2013년 후진타오(胡錦濤, 1942- ) 정권에 비해서 2013년 이후 시진핑(習近平, 1953- ) 정권이 사상통제 및 인권제약 측면 에서 더 억압적이라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후진타오 정권 시절에도 티베트 시위 진압(2008), 신장 폭동 진압(2009) 등 중공중앙에 의핸 광범위한 탄압이 자행되었지만, 시민 단체의 자발적 시위, 청원, 불법 조직의 구성과 활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방 정부가 큰 재량을 갖는 지방분권적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덕분에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은 정치적 탄압에 시달렸지만, 조직 자체를 와해시킬 정도의 큰 억압은 흔치 않았다.

이와 달리 시진핑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중앙정부에 의한 체계적인 강고한 억압 체제를 구축해왔다. 후진타오 정부는 “화해(和諧, 화평, 조화)”를 내걸고 시민사회 활동가들에 대해선 산발적인 사후적으로 통제를 가했던 반면, 시진핑 정부는 “국가안전”의 명분 아래 시민조직 활동가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시민 단체의 결성 및 활동을 선제적으로 금지하고 탄압하는 강경책으로 일관해 왔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중국 사회는 사상, 교육, 지식, 문화, 연예, 방송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가 더욱 위축되고, 국가 주도의 이념 교육의 강도는 마오쩌둥 시대 이후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는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데,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의 정도는 10년 전보다도 후퇴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대민 통제의 강화는 시진핑 정권 출범 직전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잠시 10여년 전의 상황을 복기해보자.

<“시진핑의 인터넷 안전관: 인터넷 안전없이 국가 안전 없다.” 2014년부터 시진핑 주석은 인터넷 안전을 강조하며 중국의 인터넷을 감시해오고 있다. 특히 중공정부는 특히 인터넷을 통해서 빠르게 유통되는 반정부, 반체제 및 사회비판 여론을 통제하고 있다./중국인터넷>

절대 시행해선 안 될 5가지: 다당제, 사상 다원화, 삼권 분립, 연방제, 사유화

2011년 3월이었다. 우방궈(吳邦國, 1941- )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중공중앙의 기본 이념과 국정 방향을 압축한 “8확립(八確立)”과 “5불고(五不搞)”를 발표했다. 여덟 가지 기본 원칙은 반드시 확립하고, 다섯 가지 사항은 “절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8확립”이란 1) 국가의 근본 제도와 근본 임무, 2) 중국공산당의 영도적 지위, 3)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세 가지 대표” 등 중요사상의 지도적 지위, 4)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는 노동자·농민의 연맹에기초한 인민민주독재, 5) 인민대표대회 제도, 6) 법에 따른 권리와 자유, 7) 중국공산당 영도 하의 다당 합작, 정치 협상 및 자치제도, 8) 공유제(公有制)를 기본으로 하는 다양한 종류의 경제 공동 발전, 노동 분배를 기본으로 한 다양한 분배제도의 확립 등, 이상 여덟 가지 사항을 중공중앙의 원칙으로 확립한다는 뜻이다.

“5불고”란 1) 여러 정당의 교대 집권, 2) 지도사상의 다원화, 3) 삼권분립 및 양원제, 4) 연방제, 5) 사유화, 이상 다섯 가지를 절대로 실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일면 새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잘 뜯어보면 2008년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리장춘(李長春, 1944- )이 발표한 “여섯 가지 왜(六個爲什麽)”의 연장이다. 리장춘의 “여섯 가지 왜”도 역시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천명한 “4항 기본원칙”의 부연, 설명이다.

<2011년 3월 “8확립과 5불고:를 발표한 우방궈(吳邦國, 1941- )은 2011년 당시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자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

덩샤오핑이 말한 “4항 기본원칙”은 1) 사회주의 노선, 2) 무산계급전정 (1982년 이후 “인민민주독재”로 바뀜), 3) 중국공산당의 영도, 4)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견지를 이른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개혁개방의 경제혁명을 개시할 때, 덩샤오핑은 전 중국의 인민을 향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임을 재천명했다.

1978년 11월부터 베이징의 많은 시민들이 대자보를 써서 베이징 시단(西單)의 담장에 빼곡히 붙이면서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본격적인 정치 투쟁에 돌입했다.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지 불과 2년 만에 갑작스럽게 찾아 온 “베이징의 봄(北京之春)”이었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덩샤오핑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선 곧바로 “베이징의 봄”을 강력하게 짓밟고 주동자들을 구속해서 중형으로 다스리는 강경책을 썼다.

요컨대 시진핑 정권의 강력한 대민통제 및 사상탄압은 정상궤도의 일탈이 아니라 개혁개방 이후 40년 간 중국공산당이 추진해 온 “4항 기본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지식계의 대반란...류사오보 등 지식인 303명 일당 독재 비판 ‘08헌장’ 성명

2011년 3월 발표된 우방궈의 “8확립 5불고”는 중국 안팎의 비판세력에 대한 중공중앙의 선전포고였다. 국제정치의 구체적 상황을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진다. 그보다 석 달 앞선 2010년 12월 10일 노벨위원회가 1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인 중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 1955-2017)를 노벨평화상 수장자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 23일 중국검찰기관은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류샤오보를 체포했으며, 같은 해 12월 25일 베이징 인민법원은 그에게 징역 11년을 선고했다. 바로 그 이듬해 노벨위원회는 류샤오보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함으로써 중공 정부의 인권유린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무엇보다 류샤오보가 인류의 보편가치를 선양하는 이른바 “08헌장”의 공동 저자였기 때문이었다.

“08헌장”이란 대체 무엇인가? 2008년 12월 10일, 303명의 중국 지식인들은 유엔의 “보편적 인권 선언” 6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자유, 인권, 평등, 공화, 민주, 헌정을 전면에 내세운 19개 조항의 성명서이다. “08헌장”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올해는 중국 입헌 100주년, 유엔의 ‘세계 인권선언’ 60주년, 민주장(民主墻) 운동 30주년, 중국정부의 ‘공민의 권리 및 정치 권리 국제 공약’ 승인 10주년이다. 긴 세월의 인권 재난과 파란만장한 항쟁의 역정을 거친 후에야 중국의 깨어 있는 공민들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자유, 평등, 인권은 인류 공동의 보편가치이며, 민주, 공화, 헌정은 현대 정치제도의 기본 구조이다. 이러한 보편가치와 현대 정치제도의 기본구조를 버린 현대화는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고,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재난의 과정이다. 21세기 중국은 장차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계속 권위주의 통치 하에서 현대화를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가치를 인정하고 주류 문명에 융화되는 민주적 정치 체제를 건립할 것인가? 이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다.”

<2010년 12월 5일 “류샤오보를 즉각 석방하라!” 외치는 홍콩의 시민들/ (Ed Jones/AFP) >

08헌장 “이름만 인민공화국, 실질적으로는 당 천하일 뿐” 비판

이처럼 “08 헌장”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에 대항해 보편가치를 실현하는 민주적 정치 체제의 건립을 촉구하고 있다. 곧 이어지는 문단에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서언”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도발적인” 역사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9세기 중기 역사의 큰 변화는 중국 전통의 전제(專制) 제도가 낡고 썩었음을 폭로했으며, 중화 대지에 수천 년 간 일찍이 없었던 대변국(大變局)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물질 영역의 개량에 국한된 양무운동(洋務運動, 대략 1861-1895)과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는 다시금 구체제가 시효를 다했음을 폭로했다.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은 제도 측면의 혁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완고파의 잔혹한 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내우외란의 역사조건에 갇혀서 공화국의 정체가 잠시 드러냈지만, 곧 전제주의가 되살아났다. 서양 기물(器物)의 (피상적) 모방과 제도 개혁이 모두 실패하면서 국인(國人)들은 문화적 병폐의 깊은 뿌리를 되돌아보았고, 마침내 과학과 민주의 깃발을 들고 5.4신문화운동(1910-20년대)을 일으켰지만, 내전이 빈발하고 외적의 침입이 이어져서 중국의 정치민주 역정은 중단되고 말았다. 항일전쟁의 승리 이후 중국은 다시금 헌정의 길을 열었지만, 국공내전(1946-1949)의 결과 중국은 현대 극권주의(極權主義)의 심연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어지는 문단은 “08헌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적 허구성과 중국공산당의 정책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1949년 건립된 ‘신(新)중국’은 이름만 ‘인민공화국’일뿐, 실질적으로는 ‘당(黨)천하’일 뿐이었다. 집권당이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자원을 농단하고, 반우파운동(1957-1959), 대약진운동(1958-1962), 문화대혁명(1966-1976), 6.4 톈안먼 대도살(1989)을 일으키고, 민간의 종교 활동과 기본권 수호 운동을 탄압하는 등 일련의 인권 재앙을 초래했다. 그 결과 수천 만 명이 목숨을 잃고 국민과 국가가 모두 지극히 참혹하고도 엄중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어서 “08헌장”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과 법제 개혁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법률은 있지만 법치는 없는,” “헌법은 있지만, 헌정은 없는” 중국의 정치 현실을 개탄한다. 중국공산당의 위권(威權, 권위주의) 통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유, 인권, 공화, 민주, 헌정”이라는 기본 이념 위에서 19항의 기본 주장을 조목조목 펼친다.

그 19항은 각각 1) (보편가치를 구현하는) 헌법 개정, 2) 삼권분립, 3) 입법부의 민주화, 4) 사법부의 독립, 5) 군경의 정치적 중립, 6) 인권 보장, 7) 공직 선거, 8) 지역 평등 및 거주이전의 자유, 9) 결사의 자유, 10) 집회의 자유, 11) 언론의 자유, 12) 종교의 자유, 13) 보편가치에 입각한 공민교육, 14) 재산 보호, 15) 재산세 개혁, 16) (교육, 의료, 양로 등) 사회 보장, 17) 환경 보호, 18) (홍콩과 마카오의 자유 제도를 유지하는) 중화연방공화국의 성립, 마지막으로 19) 양심수 석방, 명예회복, 피해 보상 등의 개혁적 정의의 실현 등이다.

<“08헌장”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며 “류샤오보 즉각 석방”과 “서명자 박해 중단”을 외치는 홍콩의 시민들/ wikipedia.com>.

옥중 류샤오보에 노벨평화상...중국 안팎에서 헌쟁 논쟁 커져

물론 중공중앙은 이 헌장을 용인할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총강 제1조에 따르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그 어떤 조직이나 개인의 활동도 금지된다.” 2009년 12월 말 베이징 인민법원은 류샤오보에게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를 들씌워 11년 형을 선고했다.

이듬해 12월 옥중의 류샤오보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중공중앙으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석 달 후인 2011년 3월 우방궈는 “8확립 5불고”를 통해서 중국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이념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 특징”임을 재확인했다.

2010년 이처럼 긴박하고도 혼탁한 정국에서 중국의 다수 헌법학자, 철학자, 언론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되묻는 헌정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후 중국 안팎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면서 헌정 논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2013년 5월 13일, 중공중앙은 보편가치, 언론자유, 시민사회, 공민 권리, 사법 독립 등 일곱 가지 민감한 사항에 대해선 언급조차 말라는 “7불강(不講)의 명령을 하달했다.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공산당 정권이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을 부정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7불강”이 유출되어 서구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국제사회는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고 조롱했다. 이처럼 시진핑 정권은 출범 때부터 국제사회와의 정면충돌하는 이념전쟁을 마다지 않았다. <계속>

<“중국공산당의 인터넷 자유 침해에 항의한다!” 2010년 1월 26일. 사진/ 中國人權 hrchin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