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8일, 상하이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기념관에서 중앙통전부(中央統戰部)가 주관한 “중공당원 민영 기업가들”의 연구토론회. 이날 토론회의 주제는 시진핑이 강조한 “초심을 잃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였다. 사진출처=Sohu.com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12회>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가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양하는 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을까? 공산당은 본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자본가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오늘날 중국공산당 조직에는 수백만 명의 기업가들이 이미 당원으로 가입해서 당비를 내며 당원 교육을 이수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 상황에 기민하게 적응하듯, 인간의 조직 역시 얼마든지 역사의 변화에 맞춰 탄력적으로 변형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공산당이 자본가를 흡수해서 친자본주의적 정당으로 변모할 때, 과연 그 공산당은 어떤 상황 논리, 그 어떤 합리화의 이론을 만들어낼까?

2018년 11월 26일 중국공산당 관영매체 <<인민일보>>는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개혁개방 100명의 두드러진 공헌자들”을 발표했다. 그 100명 중에는 현재 중국 3대 인터넷 기업의 창업자 3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1964- ), 텐센트의 마화텅(馬化騰, 1971- ), 바이두의 리옌훙(李彦宏, 1968- )이 그들이다. 그 명단에는 마화텅과 리옌훙은 무당파(無黨派)로, 마윈은 중국공산당원으로 기재돼 있었다.

환구시보 “당의 이익과 민영 기업의 이익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 당시 잭마(Jack Ma, 마윈의 영어 이름)하면 구미 사회에선 중국 비즈니스계의 비공식 대사로 통했다. 알리바바 그룹이 급성장하자 마윈은 부지런히 구미의 방송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작고 깡마른 몸집, 유쾌하고 소탈한 웃음. 경쾌하고 익살맞은 화법으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특히 가난 속에서 자라나 수많은 실패와 시련을 겪고도 학연, 지연, 정치적 커넥션도 없이 중국 최고 갑부로 급성장한 마윈의 성공담은 곧 세계 비즈니스계의 신화가 되었다. 2014년 <<블룸버그>>는 마윈이 순자산 미화 220억 달러의 중국 최고 부자로 꼽았고, 2017년 <<포츈(Fortune)>> 지는 그를 세계 50대 위대한 지도자 중에서 2위로 지명했다.

한 국제 경제 포럼에 참가해서 의견을 개진하는 마윈의 모습/사진출처=Qurius.com

마윈이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 날인 2018년 11월 27일 구미의 언론은 민감한 논평 기사를 쏟아냈다. 구미 언론들엔 중국공산당이 대표적인 민간 기업에 압박을 가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해석이 분분했다. 불과 두 달 전(2018년 9월 10일), 마윈은 1년 안에 알리바바 그룹의 총수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한 바 있었기에 더 큰 의혹이 퍼져나갔다. 물론 그 근저엔 중공 정부에 대한 구미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실제로 그 당시 구미에서는 중공 정부가 중국회사의 5G 네트워크가 해외 정보를 수집한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이었다.

중공중앙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바로 다음 날인 2018년 11월 28일,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구미 언론을 비판하는 사설, “중국 민영기업가, 당원이 마윈 뿐이랴?”를 게재됐다. 사설은 중국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구미 매체가 마윈을 “비정상적인 기업가,” 나아가 “세계경제의 침투자” 혹은 “특수간첩”으로 몰고 간다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구미 매체는 중국 체제에 대한 공격을 중국의 굴기에 대한 불만의 배출구로 삼으려 한다. 서방의 가치에 따라 마윈이 중공당원이라서 나쁘다고 몰아가는 전형적인 흑색선전의 수법이다······. 당의 모든 사업은 인민 행복과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이는 우수한 민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많은 부분 겹친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당의 이익과 민영기업의 이익이 모순이라는 주장이 거짓 명제임을 알고 있다.”

“기업가 중에 당원 많다...공산당은 중국의 영도집단이기 때문”

1990년대 이래 중공 기관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해 온 테제였다. 실제로 만약 중국공산당의 근본 목적이 인민 행복의 진작과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면, 민영 기업의 영리 추구와 전혀 모순될 바 없다. 다만 그렇게 되면, 중국공산당의 근본목적으로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 사상과 충돌될 뿐이다.

“중국은 극히 박약한 경제 발전의 기초 위에서 국민 경제의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경제와 사회 각 방면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사실 중국이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룬 경제 및 사회의 진보는 세계 최대 수준이다. 이는 곧 중국 체제가 전체적으로 건강하고 합리적이라는 증거다. 이러한 증거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사상과 능력 측면에서 서방 엘리트 집단의 비극일 뿐이다.”

경제발전, 치안유지, 사회통합 등 모든 면에서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성공적이기 때문에 계속 통치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순환 논리이다. 구미의 정치학자들은 이를 흔히 “실적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이라 부른다. 물론 실적 정당성만으로는 권력의 공고화에 완벽하게 성공하기는 어렵다. 어떤 정권이든 보다 강력하게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논리 계발보다는 세력 규합에 성공해야 한다. 때문에 사설은 중국공산당이 세력규합에 성공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실 중국의 민영 기업가들 중에는 공산당원들이 매우 많다. 저명한 기업가 량원건(梁穩根, 1956- ) 왕젠린(王健林, 1956- ), 쉬자인(許家印, 1958- ), 류촨즈(柳傳志, 1944- ) 등도 모두 당원이다. 이는 중공과 개혁개방의 성취 사이의 깊은 관계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비단 민영 기업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부분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은 높은 비율로 공산당원이다. 중공은 중국 건설의 주력군이며, 중국의 영도집단이며, 국가의 전진을 추동하는 활력소다. 중국사회는 중공당원이 발휘하는 적극적 작용을 정면에서 긍정한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래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인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다수 기업가를 당원으로 흡수하는 정치적 마술쇼를 펼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잠시 거시적으로 중국 “개혁개방”의 역사를 돌아보자.

1989년 11월 17일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일어난 “벨벳 혁명.”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이후 선거에서 1948년 이해 처음으로 비공산당 정치인 하벨(Václav Havel, 1936-2011)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진=Kafkadesk.com

덩샤오핑 ‘민주화 없는 자본주의’ 정책...공산당 일당 독재는 계속

잘 생각해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40-5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마니교적인 이분법으로 양분했던 냉전(冷戰, the Cold War)은 결국 사유재산권을 놓고 벌어졌던 이념 전쟁이었다. 사적소유를 죄악시하는 공산주의 국가들은 모든 재원을 집산화(集産化)하고 중앙집권적, 폐쇄적, 고립적, 착취적(extractive) 명령경제로 국가를 운영했다. 반면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개인 및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분권적, 확산적, 개방적, 상호의존적, 포용적인 시장경제로 돌아갔다.

1980년대 말, 소련이 흔들리고 동구에 자유화의 물결이 덮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냉전의 거대서사가 자본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그렇게 종결되리라 내다봤다. 1989년 5월 중국의 베이징에서 먼저 극적으로 일어났지만, 6월 4일 중공중앙이 탱크 부대를 급파해 시위대를 학살하면서 민주화의 열기는 무력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그해 가을 베이징의 열기는 베를린,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샤바로 이어졌다. 급기야 1991년 말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는 역사의 격변이 전개되었다.

이에 존폐의 기로에 선 중공중앙의 강경세력은 “개혁개방”의 여러 조치를 철회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의 회귀를 추진하지만, 1992년 1월 수전증을 앓던 80대 고령의 덩샤오핑은 3주 간 기차를 타고 남방의 경제특구를 순례하며 “개혁개방”의 당위를 역설하는 이른바 “남순(南巡) 강화”를 통해 정책의 방향을 급선회했다. 덩샤오핑은 “남순 강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모토 아래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견지한 채로 민간 경제를 최대한 활성화한다는 개발독재의 논리였다. 덩샤오핑은 당시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네 마리 작은 용”의 모델을 통해서 중국에서도 민주화 없는 자본주의가 가능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확신대로 3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인구의 18.5%에 달하는 중화대륙은 여전히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레닌주의 국가”(Leninist state)로 남아 있다. 1990년대 내내 중국은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어갔고, 바로 그 성과를 근거로 일당독재의 정당성을 강화해갔다. 1990년 후반으로 가면서 중국공산당은 우리가 “잘 하니까 계속하자!”는 논리만으로는 일당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듯하다.

1992년 1월 남순(南巡) 당시의 덩샤오핑. 사진출처= https://www.taiwannews.com.tw/en/news/3561454

장쩌민 “당내로 민영 기업가들, 과학기술 인력, 자영업자를 흡수해야”

2000년대에 들어서기 무섭게 중공중앙은 10년 넘게 급속한 성장세를 이어간 민간부문의 기업가들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2001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8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중공 총서기 장쩌민(江澤民, 1926- )은 기업가 및 자산가를 당내로 영입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1921년 창당 이래 중국공산당은 전통적으로 노동자, 농민, 군인, 혁명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혁명세력의 조직이라 정의되어 왔다.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에 자본주의 첨병들을 당원으로 가입시킨다는 발상은 실로 공산당사에 유래 없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예고했다. 80주년 창당 기념사에서 장쩌민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쳤다.

“개혁개방 이래 우리나라 사회계층의 구성엔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다. 과학기술 분야의 민영 기업의 창업자들, 과학기술 인력, 외자를 유치한 기업의 관리 기술 인력, 자영업자(개체호), 사영기업주, 중개조직의 종사자들, 자유직업 인원 등의 사회계층이 생겨났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여러 형태의 소유제와 다양한 업무에 따라 다양한 지역으로 빈번하게 이동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직업과 신분 상에도 계속 변동이 일어난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위대하고도 지난한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건설 사업에서는 전 사회 각 방면에서 조국과 사회주의에 충성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필요하다. 그 인재들은 자기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군중을 이끌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발적으로 당의 노선과 강력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할 수 있는가, 당원의 조건에 부합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새로운 당원을 흡수하는 주요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 및 지식분자 출신의 당원들은 당의 대오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조직의 성원이자 핵심 세력이지만,······ 사회 여러 방면의 우수한 인재들을 당내에 흡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의 당이 사회에 대해 갖는 영향력과 응집력을 끊임없이 증강해야만 한다!” (“2001년 중국공산당 80주년, 총서기 장쩌민 강설”에서)

곧이어 장쩌민 정권은 중국공산당 헌장(憲章: 당헌)에 명시된 당원의 자격 규정을 대폭 수정해서 다수의 기업가 및 자산가를 공산당에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넘어가던 2000년에서 2006년 사이 5-6년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백여 만 명의 기업가와 자산가들이 속성으로 당원 교육을 이수하고 중국공산당원의 자격을 획득하는 특혜를 누렸다. 적어도 표면상 다수의 민영기업가들이 속성 절차를 밟고 “공산당원 민영기업가”가 되는 입당 러시(rush)가 전개되었다는 얘긴데······.

<2002년 7월 1일 홍콩 반환 5주년 기념식에서 장쩌민의 모습. 사진/ https://www.scmp.com/news/china/politics/article/3145542/online-wishes-pour-former-chinese-president-jiang-zemin-turns>

‘홍색 자본가’ 다수는 기존 당원이 기업가로 변신한 경우

물론 그 실상을 밝히기 위해선 당시 입당한 수많은 민영 기업가들의 이력과 배경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선 2020년 ”중국 경제 리뷰(China Economic Review)”에 발표된 중국 및 이탈리아 경제학자들의 연구, “붉은 민영 기업가의 흥기(The Rise of Red Private Entrepreneurs)”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6차례에 걸친 정부 조사를 분석한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민영기업가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역으로 기존의 당원들이 대규모로 민간 영역에 뛰어들어 기업가로 변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2002년 법제 개정 후, 민간 경제에 뛰어들어 기업 활동을 시작한 기존의 당원들 중에는 정부에서 요직을 점하고 있던 고급 관원들이 다수였다. 게다가 시장경제가 덜 발달되고, 법적 보호가 부족하고, 지방정부의 부패 정도가 심한 지역에서 그들의 활약이 더 두드러졌다. 쉽게 말해, 공산당 정부에서 간부의 직책을 맡아 장시간 녹을 먹어 왔던 당원들이 정치권력을 경제력으로 바꾸는 기회를 더 기민하게 포착했다는 이야기다.

이 논문에 따르면 2000년-2006년 500만 명의 “홍색 자본가들” 중 압도적 다수는 기존 당원이 2002년 이후 민간 경제로 들어간 경우였다. 중국공산당 당헌의 당원 규정이 완화되자 기존 당원들이 합법적으로 기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관원(官員)이 민간 경제로 진출할 때 중국인들은 “샤하이(下海),” 곧 “바다에 나아간다(혹은 배를 띄운다)”고 표현한다. 2002년 이후 바다에 배를 띄운 “붉은 자본가,” “홍색 기업인”들은 결국 기존의 당원들이었다. 2000년대 중국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음을 증명하는 단적인 사례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