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Xyrlpg7v4lI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준 묘역에 붙은 원세개의 만가(輓歌)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헤이그 밀사 이준 묘가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으로 떠났다가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지사다. 1963년 그 유해가 봉환돼 이곳에 묻혔다. 흉상이 걸린 탑 왼쪽 벽에 이준을 기리는 글이 보인다.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剖胸濺血示心眞 壯節便驚天下人 萬里魂歸迷故國 千家淚洒哭忠臣(부흉천혈시심진 장절편경천하인 만리혼귀미고국 천가루쇄곡충신·가슴을 갈라 피를 뿌려 그 진심을 보였으니/장한 절개 천하를 놀라게 했네/그 혼이 만 리에서 돌아와 고국을 헤매니/집집마다 통곡하며 충신을 기리네)…’
탑 오른쪽에는 1963년 이장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쓴 ‘殉國大節(순국대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큰 절개)’ 휘호와 1907년 밀사들이 소지했다는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 신임장이 새겨져 있다.
탑 왼쪽에는 앞에 인용된 만가를 필자 육필로 따로 새겨놓았다. 필자 이름은 원세개(袁世凱)다. 1912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이 된 그가 1859년생 동갑내기 조선 지사 죽음을 애도하며 만가를 지었다. 어느 경로로, 언제 그가 이 시를 써 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와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조선 국왕 고종 위에서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관리다. 조선이 부국도 강병도 체제 개혁도 할 수 없었던 속국 체제의 상왕이었다.
우습지 않은가. 조선 독립을 호소한 애국자 묘역에 그 조선을 일찌감치 말아먹은 청나라 관리와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제국 황제 흔적이 동격(同格)으로 붙어 있으니.
옛날에도 그랬다. 1882년 11월 27일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여 장정을 제정한다. (장정 개정은) 수시로 청나라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이 협의해 처리한다.’
중국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고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반년 뒤 조선이 청나라 속국으로 제대로 전락한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2022년 1월 12일 ‘조미조약 체결 전 조선 대표는 청 황실에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참조)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9. 對中 굴욕외교와 1882년 조중상민수륙통상무역장정2/끝
임오군란, 그리고 작심한 청나라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두 달 뒤 임오군란이 터졌다. 1882년 양력 7월 23일이다. 8월 19일 청나라에 출장 중이던 조선 관료 김윤식과 어윤중이 이리 주장했다. “난군 뒤에는 대원군이 있으니 이는 내란이다. 일본이 개입하기 전 출병해 평정해 달라.”(김윤식, ‘음청사(陰晴史)’ 1882년 음력 6월 19일)
이미 청 정부 최고의사결정기관인 판리군기사무처는 이홍장에게 조선 출병을 지시한 터였다. 청 정부는 조선을 청의 마지막 속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권혁수, ‘이홍장의 조선인식과 정책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논문, 1999, p90) 김윤식이 주문하기 전인 8월 10일 청나라 군사가 제물포 월미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정여창 부대가 승선한 이 군함에는 조선 관리 어윤중도 탑승했다. 조미조약을 중개한 마건충도 함께였다.
조미수호조약 본문에는 조선이 중국 속국임을 삽입시키지 못한 청에게 또 기회가 왔다. 정여창 부대에 이어 김윤식이 동행한 오장경 부대가 아산만으로 상륙했다. 8월 25일 청나라 연합부대가 용산에 진영을 차렸다. 다음날 청군은 흥선대원군을 용산 병영으로 초대해 이렇게 통고했다. “황제가 책봉한 국왕을 속였으니 실로 황제를 업신여긴 죄, 용서 못한다(欺王實輕皇帝也罪當勿赦·기왕실경황제야죄당물사)!”(마건충, ‘동행삼록(東行三錄)’, 1882년 음력 7월 13일) “무슨 꿈속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냐(將作雲夢之遊耶·장작운몽지유야)”라고 대원군이 저항했다. 사령관 보좌관이 대원군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운 뒤 끌고 나갔다. 대원군은 천진으로 압송됐다.(심조헌, ‘용암제자기(容庵弟子記)’: 沈志遠, ‘袁世凱與張謇’2, 古今 52, 古今出版社, 上海, 1944, p1911, 재인용) 청 정부는 대원군에게 ‘영구 귀국 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해 12월 또 심문을 받는데, 대원군이 말했다. “천하(天下) 대세에 따라 나라 개방도 해야 하니.” 그러자 젊은 청 관료 오여륜이 쏘아붙였다. “천하라고? 일국(一國)에 대해서만 말하라(莫言天下 執事且論一國·막언천하 집사차론일국).”(대원군, ‘보정부담초(保定府談草)’)
조청상민수륙장정과 속국 조선
조미조약 체결 나흘 뒤인 그해 5월 26일 청 정부는 천진에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조-청 교섭문제를 이리 통보했다. ‘조선은 중국 속국이어야 한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조약을 맺을 때 베트남이 중국 속국임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침략을 받았다. 체결 업무는 북양대신 이홍장과 조선 국왕 대표가 진행한다.’ 어윤중은 기존 조공 체제에 대해 조공 물량 같은 부분적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권혁수, 앞 논문, p109~111)
그리고 임오군란이 터졌다. 협상은 중단됐다. 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고 중국은 갑(甲)이 됐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27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됐다. ‘고종실록’에는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고 기록돼 있다. 내용은 이러했다. ‘조선이 오랫 동안 제후국임은 (중략)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다(朝鮮久列藩封 毋庸更議·조선구열번봉 무용갱의).’ ‘중국 관리가 조선 항구에 주재하며, 조선 관원과 견해가 충돌하면 북양대신에게 조회한다.’ ‘중국상인 범죄는 중국이 심의하고 조선인 범죄는 중국 관리와 협의해 처리한다. 중국 내 조선인 범죄는 중국이 심의한다.’ 전문에는 이런 조항이 더 붙어 있었다. ‘이는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이므로 다른 나라가 동일한 이득을 보라는 뜻은 아니다.’
중국은 조선 땅에서 마음대로 장사하고 조선은 중국에서 중국 법을 지키며 장사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약 명칭은 대등한 국가 간 ‘조약(條約)’이 아니라 주국과 종국 사이 맺는 ‘장정(章程)’이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삽입시키지 못한 속국 조항을 청나라는 6개월 뒤 대놓고 장정 전체에 규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총독 원세개와 잃어버린 12년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조중장정이 체결되고도 청나라 군사는 조선에 남았다. 군란으로 군사가 와해되자 고종은 청군 사령관 오장경에게 청나라식 친위군 창설을 요청했다. 그 창설 작업을 맡은 이가 바로 용산 청나라 병영에서 대원군을 납치해 그로 하여금 40대 관리에게 천하를 논하려는 입을 다물게 만든, 스물세 살짜리 젊은 사령관 보좌관 원세개(袁世凱)였다.(이양자, ‘조선에서의 원세개’, 신지서원, 2002, p29)
1884년 민비 척족 요청에 의해 갑신정변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원세개는 이후 원대인(袁大人)이라 불리며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직책명은 조선에 주재하는 청나라 교섭 및 통상 대표라는 뜻이지만 인사권까지 장악한 실질적인 총독이었다.
그 1882년부터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직후 원세개가 청으로 급거 귀국할 때까지 12년 동안 아시아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군사만 봐도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청나라에서는 북양함대라는 아시아 최강 해군이 창설됐다. 이를 본 일본은 이에 맞서는 근대 해군을 조직하고 북양함대에 필적하는 군사력을 키웠다. 그사이 조선은 청나라 요청에 따라 영선사를 파견해 소총 공장을 견학하고 탄알 제조창을 만들었다. 임오군란이 폭로한 신분과 경제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청나라에 기대던 민씨 척족 정권은 원대인과 더불어 사대 체제 속에 안락했다. 1894년 그 민씨 정권에 대한 반발이 동학전쟁으로 터졌을 때, 고종 정권은 바로 그 원대인에게 청나라 병사를 불러 민란 진압을 청했다.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12년을 상실한 것이다.
반전, 조선 국왕의 읍소(泣訴)
1887년 조선이 미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청나라는 ‘속국의 공사 파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결국 청이 조건을 걸었다. ‘주재국에 도착하면 바로 청나라 공사관에 보고하고 부임인사 또한 청 관리와 동행하며’ ‘공식 모임에는 청국 관리 뒤를 따르고’ ‘중대 외교 문제는 반드시 청국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다.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초대 공사 박정양은 워싱턴DC 도착과 함께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해버렸다. 1888년 내내 원세개는 박정양을 소환해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1891년 10월 조선은 박정양을 중용하지 않겠다고 청에 약속해줬다. 조선의 자주 의지가 보이는 사건이었다.(권혁수, 앞 논문, p242~246)
그런데 1894년 동학전쟁이 터졌다. 청나라 군사를 부르자 일본군까지 출병했다. 일본군은 청군을 대신해 무자비하게 동학 농민을 진압했다. 경복궁까지 침입했다. 그리고 일본 지원을 받은 근대 개혁, 갑오경장이 시작됐다. 그러자 자주 외교를 반짝였던 그 고종이 청 황제에게 편지를 쓴다. 민씨 일가인 민상호(閔商鎬)가 밀사로 파견돼 이를 황실에 전달했다.
‘500년 동안 중국이 하사한 인물을 왜적이 가져갔으며 십수년 구입해 병기고에 소장한 무기를 모두 빼앗겼나이다. 천조(天朝)에서 구원을 내려 주시기를 단단한 충성과 정성으로 애걸하옵나이다(斷斷忠悃乞賜救援·단단충곤걸사구원).(‘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16, 1308, p9, 1894년 음력 7월 5일: 유바다, ‘청일전쟁기 조청항일 연합전선의 구축과 동학농민군’, 동학학보 51, 동학학회, 2019, 재인용) 그때 풍경이나, 2022년 겨울날 수유리에서 목격한 풍경이나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