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1894년 갑오년 7월 25일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시작된 청일 두 나라 사이 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갔다. 아산과 성환 육전에 이어 평양에서 두 나라가 맞붙었고, 전선은 압록강 앞 황해해전으로 확대됐다. 황해를 건넌 전선은 당시 무적함대라 불렸던 북양함대 사령부 대련항 포격으로 끝을 맺었다. 그 매 전투에서 청은 참패했다. 청에게는 대참패, 일본에게는 대승첩이었다. 성환 전투 직후 그리고 평양성 전투 직전, 당시 종군했던 일본 ‘박문관’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나인이 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긴다.”(‘일청전쟁실기’ 2편, 박문관, 1894년 9월 10일) 개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그 가을날, 이 일본기자는 무슨 근거로 이렇게 예언을 한 것인가.

290.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③황실 부패가 초래한 대참패

예언의 징조, 나가사키 난동

함대가 공식 출범하기 전인 1886년 8월 10일 북양함대가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모두 6척이었다. 목적은 석탄 보충과 선박 수리였다. 군함 규모가 워낙 커서 중국에는 이들을 수리할 수 있는 독(dock) 시설이 없었다. 입항 사흘째인 8월 12일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하선한 청 수군들이 함께 정박해 있던 일본 해군 병사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민간인까지 개입된 두 차례 싸움 끝에 청군에는 사상자가 50명 발생했고 일본 측은 31명이 죽거나 다쳤다.

8월 20일 협상을 위해 파견된 일본 관리에게 이홍장은 “청 해군을 공격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칠게 응대했다.(馮靑, ‘中國海軍と近代日中關係’, 금정사, 2011, p27) 게다가 7000톤급인 정원호는 1853년 도쿄만에 출현해 개항을 요구했던 흑선(黑船), 3000톤급 미국 군함 미시시피호보다 더 컸다. 그런 군함이 네 척이나 나가사키에 기항해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일본 민간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어렵사리 외교적으로 사건은 무마되고, 이후 북양함대는 두 차례 더 일본을 방문해 천조국의 위엄을 과시했다. 그때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강이었다.

청나라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이 일본에 항복하는 장면을 그린 일본 판화 상상도. 정여창은 황해해전에 패색이 짙어지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영국박물관

천조국의 오만과 혹독한 대가

1891년 6월 30일 북양함대가 두 번째 일본을 찾았다. 이번에는 연료 수급이 아니라 친선이 목적이었다. 함대는 모두 여섯 척으로 구성됐다. 7000톤급 진원, 정원(定遠) 호를 비롯해 경원, 래원, 치원과 정원(靖遠) 호. 모든 군함에는 먼 곳을 누르고(鎭) 바르게 만들고(定), 경략하고(經) 따위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일본 해군 또한 군함이 6척이었는데, 총 톤수(2만5260 대 1만5730)를 비롯해 군사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난동은 없었다. 대신 청 사령관 정여창은 도쿄, 요코하마, 나가사키 같은 항구를 순방하며 고관대작을 함상으로 초대해 파티를 벌였다. 함내를 견학도 시키며 대국의 위엄과 교양을 한없이 과시했다. 이듬해 6월 23일 북양함대는 7000톤급 진원(鎭遠)호 대신 소형선인 위원호를 방문단에 포함시켜 일본을 찾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1894년 압록강 앞바다에서 황해해전이 터졌을 때, 일본 함대는 북양함대 사령선인 정원호 하단 석탄창고와 상층 양쪽 사관실과 두 칸짜리 최상부 선장실을 집중 포격했다. 또 정원호 사령탑을 맹폭격해 사령관 정여창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모두가 두 번째 나가사키 기항 때 북양함대가 일본 군부와 관료와 기자들에게 스스로 공개한 군사 기밀이었다. 세 차례 방일 과정에서 청나라는 흥에 겨워 함내 구조를 노출하고 치명적인 정보를 일본에 제공해 버린 것이다.(馮靑, 앞 책, p43) 천조국이라는 한물 간 오만과 일본을 그저 ‘먼 곳에 있는 근심거리(遠慮·원려)’로 생각했던 안이한 판단이 초래한 현실이었다.

일본의 각성과 굴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 작업에 뛰어들었다. 막부와 막부 토벌파는 속도를 달리하며 광적으로 서구화 작업에 몰두했다. 반막부파가 승리한 이후 메이지유신은 일본을 주변 아시아 국가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터졌다. 정변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진압됐다. 이듬해 일본 전권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나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도 동시 출병한다’는 내용이다.

그때 이토가 이홍장에게 이리 말했다. “청나라는 진보와 개혁이 필요합니다.”(일본 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8권 2책, p383) 메이지유신을 이끄는 이토 스스로를 자랑하는 말이기도 했고 서양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동족 황인종 국가에 대한 충고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다.

9년 뒤 조선에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조선 고종-민씨 척족 연합정권 요청에 청이 조선으로 출병했고, 일본이 그 조약을 내밀며 동시 출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이 이겼다. 아시아는 일본 놀이터로 변했다.

북양함대가 나가사키에서 자폭(自爆) 수준으로 공개해버린 군사 정보가 일본 승리의 큰 요인이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전쟁 전 청일 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천하무적 청나라 해군의 몰락 원인은 ‘1+1=2′라는 셈법보다 더 답이 쉽다. 청은 자멸했고 일본은 각성한 것이다.

나가사키의 충격과 일본의 각성

북양함대가 일본 항구 곳곳에서 벌인 뻘짓은 일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1891년 2차 방일 때 정원호가 히로시마 구레(吳)에 기항했을 때, 당시 진수부 참모부장 도고 헤이하치로는 정원호 주포에 수병들이 더러운 빨래를 걸어놓은 장면을 목격했다. 함대원 사이에는 도박과 흡연이 만연했고 군복에는 치렁치렁한 소매가 달려 있었고 군화는 헐렁거려서 1리만 행군해도 적에게 포로가 될 판이었다. 일본은 저 거대한 철갑선이 던진 충격과 그 충격 아래 노출된 허깨비 군기(軍紀)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1872년 일본은 중국 대륙에 낙선당(樂善堂)과 일청무역연구소라는 조직을 설립하고 정보 수집에 돌입했다. 낙선당은 5년 뒤 ‘청국통상총람’이라는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이 첩보전에 또 청 정부 뻘짓이 포함됐다. 1893년 일본군 참모본부 장교들을 답방 형식으로 초청한 것이다. 이들은 무기 제조창인 천진기기국과 군사훈련장인 무비학당을 이 잡듯 둘러보고 귀국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숫자로 보면 우리가 참패하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우리가 전승(全勝) 한다.”(李元鵬 外, ‘晩淸近代化軍事改革的悲歌’, 軍事歷史 2014(03), 軍事科學院軍事歷史和百科硏究部)

그 ‘숫자’ 또한 승리하기 위해서 일본은 거국일치로 군사력 증강 작업에 돌입했다. 북양함대 3차 방일 이듬해인 1893년 2월 10일 천황 메이지는 “군비 증강을 위해 매년 30만 엔을 하사하니 각료들 또한 봉급 10%를 갹출하라”고 명했다. 명은 이행됐다. 해군은 북양함대 거함(巨艦)에 맞설 수 있는 작고 날렵하며 속공이 가능한 속사포로 무장한 군함을 속속 건조했다. 전쟁 직전 일본해군은 군함 31척, 어뢰선 24척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변신해 있었다.(馮靑, 앞 책, p38)

자희태후(서태후). 동치제 생모로 청말 권력을 휘두른 실세다. 극에 달한 사치와 부패로 청제국을 자멸시켰다. /위키피디아

궁궐 복원공사로 날려버린 군함들

그때 청나라 실권자는 서태후였다. 서태후는 당시 황제 광서제의 이모였다. 아편전쟁 이후 청 조정은 근대화와 전통적 쇄국 사이에 분열돼 있었다. 서태후를 지지하는 만주족 관료들은 쇄국을 주장했고 한족 관료들은 개방을 지지했다. 개방은 필연이었다. 두 계파가 타협해 나온 방책이 중체서용(中體西用), 서양 기술만 도입하는 개방이었다. 개방을 주도한 사람은 한족인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북경에 있는 궁궐 청의원(淸議園)이 서구 열강 연합군에 파괴됐다. 서태후 파는 이 청의원을 복원해 수구파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다. 복원공사는 바로 그 자리에 해군학교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명분으로 삼았다. 1886년 이화원(頤和園)으로 개칭한 청의원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해군학교 건립 예산이 투입됐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1888년 3월 13일 광서제가 이렇게 발표했다. ‘이화원을 수리해 대경(大慶)의 해에 군신을 거느리고 축하하리라.’

‘큰 경사의 해’는 서태후가 환갑을 맞는 1894년이다. 그해 11월에 벌어질 환갑잔치를 위해 이화원을 복원하는데, 그 비용 조달을 ‘해군학교 설립’으로 포장해버린 것이다.(戚其章, ‘颐和園工程與北洋海軍’, 社会科學戰線 1989(04), 吉林省社会科学院) 황명이 떨어진 그 1888년 북양함대가 독일산 철갑선을 갖추고 공식창군됐다.

하지만 해군은 260만 냥이라는 거금을 확보해 놓고도 그 이자를 이화원 공사에 투입하도록 규정하는 바람에 원금은 한 푼도 사용하지 못했다. 이화원에 있는 곤명호 뱃놀이용으로 소형 선박을 자체 예산으로 제작하고 천진~이화원을 잇는 선로와 7량짜리 기차도 도입해야 했다. 1891년에는 100만 냥을 공사자금으로 대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청일전쟁이 터진 1894년까지 북양함대는 단 한 척의 군함도, 단 한 문의 대포도 새로 도입하지 못했다. 1893년 이홍장이 ‘(일본군과 같은) 속사포 12문을 정원, 진원호에 탑재해달라’고 주청했으나 이는 설치되지 않았다. 전쟁 직전인 1894년 5월 이홍장이 상소문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아래에서는 신식 쾌속선을 주문하는데 우리 군은 창건 이후 단 한 척도 증강하지 못했다. 모두 신(臣)의 책임이다.”(李鴻章, ‘覆奏海軍统將折’: 游戰洪, ‘德國軍事技術對北洋海軍的影响’,中国科技史料 19권(04), 清華大科學技術史暨古文献研究所, 1998, 재인용)

함대 예산은 환갑잔치 비용으로 전용됐다. 대청제국이 호령하던 천하는 그 잔칫집 밥상으로 사라졌다. 벌 떼처럼 달려든 일본군에 의해 천하가 붕괴되던 그 꼬라지를 다음 회에 구경해본다.<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