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만 해도 저가 AP(스마트폰용 프로세서)나 만들던 업체였는데, 세계 3위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전문업체)로 올라섰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2013년까지 삼성전자에서 스마트폰을 개발했던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대만 팹리스 미디어텍의 약진에 탄식했다.
김 교수가 탄식한 이유는 이 업체의 팹리스 도약 기회를 한국은 놓쳤기 때문이다. 미디어텍이 AP 시장에 도전한 2011년만 해도 외견상의 경쟁력은 한국이 월등했다. 삼성은 2010년 출시한 갤럭시S1에 이미 자체 AP를 탑재한 반면, 미디어텍은 당시 시장 진입도 못 했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미디어텍이 시장 진입 10년도 안 돼 업계 최강자가 됐다. 2020년 말 퀄컴을 누르고 1위에 등극했다. 작년 3분기 AP 세계 점유율 40%로, 2위 퀄컴(27%)과 격차를 점점 벌리고 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AP 점유율은 5%에 불과했다. 처음엔 저가·저성능 위주였지만, 애플·퀄컴·삼성 독무대였던 고성능 AP 시장까지 들어오고 있다.
여세를 몰아 미디어텍은 작년 전 세계 반도체 기업 7위, 팹리스만 따지면 퀄컴·브로드컴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작년 매출은 4934억대만달러(21조3000억원). 한국은 팹리스 상장사 상위 20곳 매출을 합쳐봐야 미디어텍 1곳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도 대형 팹리스를 키워야 한다며 20년 전부터 갖은 방안이 나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미디어텍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의 팹리스 발전에 필요한 아이디어가 이 업체 역사에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텍의 성공 원인을 분석했다.
◇기술의 큰 흐름 바뀔 때가 고객 잡을 기회
미디어텍은 시장 방향을 제일 먼저 파악하고 고객사가 원하는 기술을 가장 빨리 쓸 수 있게 제공했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이후 5G라는 스마트폰 통신 규격 변화에 가장 빨리 대응한 것이다. 전 세계 스마트폰 고객사가 원하는 5G 칩세트(Chip Set)를 가장 빨리 싼값에 믿을 만한 품질로 제공했다.
미디어텍이 4G 시대엔 퀄컴을 이기지 못했지만, 고가부터 중저가까지 5G 스마트폰용의 다양한 AP와 관련 반도체군(群)을 개발해 오포(OPPO)·비보(Vivo)·샤오미 등 중국의 거의 모든 제조사 5G폰 물량을 장악했다.
기술이 바뀌는 시점에서 새 기술을 선점해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은 미디어텍 창업 때부터 반복된 것이다. 미디어텍은 대만 파운드리인 UMC의 사내 조직에서 출발했다. 컴퓨터의 CD드라이브용 LSI(고밀도 집적회로)를 설계하는 곳이었다가 1997년 분사했다. 그때만 해도 대만의 작은 팹리스 중 한 곳에 불과했다.
당시는 광디스크 시장이 CD에서 DVD로 바뀌는 중이었다. 이때 DVD 전용 LSI를 개발해 업계 1위였던 일본 도시바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
◇고객 이익 최우선으로 장기 관계 구축하며 동반 성장
20년 전 미디어텍이 일본 업체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공급자가 아닌 고객 이익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업체는 DVD 드라이브에 필요한 여러 칩을 따로 팔았다. 미디어텍은 영상 재생용 칩과 모터 제어 칩 등을 묶어 완제품에 가깝게 제공했다. 납품 단가도 일본 부품을 각각 사는 것보다 저렴했지만, 고객사의 시스템 개발 수고를 덜어준 게 주효했다. 2000년대 중반 미디어텍은 DVD용 칩 세계 시장의 50%를 석권하기에 이른다.
DVD 드라이브 시장을 제패한 미디어텍은 2004년 중국 피처폰용 칩 시장에 진출했다. TI(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기존 업체는 통화 기능밖에 없는 단순 제품을 팔았지만, 미디어텍은 동영상·음악 재생이 가능한 다기능 칩을 경쟁사와 비슷한 값에 팔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8년 휴대폰 칩이 자사 매출의 50%를 넘게 된다.
미디어텍과 고객사는 장기적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해 나갔다. 예를 들어 오포는 원래 DVD·MP3 플레이어 업체였지만, 2008년 미디어텍 칩세트를 활용해 MP3 플레이어 기능을 탑재한 피처폰을 내놓으며 휴대폰 업체로 변신했다. 이런 관계는 훗날 샤오미·오포·비보(오포의 형제 회사) 등의 스마트폰과 미디어텍 AP 조합으로 발전한다.
◇부품·소프트웨어·설계도 포함한 토털 설루션으로 승부
미디어텍은 여세를 몰아 TV·무선통신 칩세트에 차례로 진출했다. 2002년 이후 7년 만에 4배 성장하지만, 2007년 아이폰 등장의 여파로 2010년쯤 급제동이 걸렸다. 위기를 느낀 미디어텍은 2011년 스마트폰 AP 시장에 뛰어들었고, DVD·휴대폰·TV·통신 칩에서 검증된 통합 서비스 전략을 구사해 또 성공했다.
연이은 성공의 이유는 칩세트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검증된 레퍼런스 보드(칩세트와 관련 부품을 기판에 꽂아 실제로 동작하게 한 것)를 묶어 제공하는 ‘토털 설루션’에 있었다. 이 설루션을 사용하면 시스템 기술력이 낮은 중국 업체도 최신 스마트폰을 값싸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다. 중국 신흥 가전·휴대폰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한 데는 미디어텍의 이런 종합 기술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심재윤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는 “과거엔 단일 기능 칩이 많이 팔렸지만, 지금은 팹리스가 SOC(System on Chip·하나의 칩에 제품의 시스템을 통합한 것)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제공해야 살아남는다”면서 “한번 미디어텍 고객이 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도 그들의 토털 설루션 제공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팹리스 다 합쳐도 미디어텍 10분의 1… 20년째 말뿐인 육성 전략
미디어텍의 토털 설루션 전략은 한국 팹리스 육성에도 시사점을 준다. 고객이 안 사주면 모든 게 허사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민·관 컨소시엄 육성책을 보면 이런 ABC가 무시됐다는 지적이다. ‘K 반도체’라며 한국형 시스템 반도체를 만든 사례도 있지만 수요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팹리스가 반도체를 만들어봤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고객이 쓰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사가 자신들의 제품·서비스에 맞는 높은 성능 지표를 팹리스에 정확히 요구하고, 팹리스가 그 요구를 맞추는 과정이 반복돼야 한다는 얘기. 정부가 과제를 만들고 예산을 쪼개 배분해 국내 팹리스의 반도체 개발을 지원한다고만 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지난 20년간 대만 정부의 체계적 지원 계획 아래 자국의 최고 인재와 중화권 공급망의 혜택까지 누린 미디어텍 같은 곳을 따라잡는 게 쉽진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국내 설계 역량을 높이고, 인력을 양성하고, 제품을 소화해줄 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만들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절실하다.
모바일 분야 등에서 퀄컴·미디어텍과 같은 대형 팹리스를 기대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미디어텍이 그랬듯 기술의 큰 흐름이 바뀔 때를 노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뀌는 자동차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가 SDV(Software Defined Vehicle·차량 기능이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는 차, 무선 업데이트로 기능이 개선되는 차) 개발의 큰 그림을 그린 뒤 국내 팹리스와 연계하는 방법도 있다. 홍성수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 논리에 맡기더라도, 국내 SDV 스타트업을 키워 이들을 고객사로 삼아 국내 팹리스를 키우는 것을 검토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제조설비(fabrication)에 ‘없다’는 뜻의 접미사(less)를 합성한 말. 대표 기업으로 퀄컴·브로드컴·미디어텍 등이 있다.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 외에도 삼성·인텔처럼 설계~생산의 전 과정을 맡는 종합반도체 회사(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팹리스에서 위탁받아 제작만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foundry)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