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수도권 공화국’이다. 60년 넘게 진행된 수도권 집중화로 국토 면적의 11.8% 남짓한 서울·인천·경기도에 총인구의 51%, 상위 1000대 기업의 74%, 100대 상장사 중 91%가 몰려 있다.
수도권 과밀화와 이에 따른 집값 급등은 저출산을 고착화하는 주범이다. 한국의 출산율은 2018년부터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5년 연속 부동(不動)의 꼴찌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지방소멸 속도가 매년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2000년 6개이던 인구 3만명 미만 시·군·구(市郡區)는 20년 만에 18개로, 2013년 75개이던 소멸위험 지역은 지난해 108개로 각각 늘었다. 지금 추세라면 30년 후에 전국 228개 시·군·구의 절반 정도(47%)가 사라진다.
◇300조 쏟아도...’백약이 무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최근 지역균형발전특위를 설치할 정도로, 지방소멸은 국가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사안이다. 역대 정부도 2006년부터 15년간 300조원의 예산을 쏟아부으며 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신생아 일인당 300만~1500만원의 장려금 지원으로 출산율 전국 1, 2위인 전남 영광군과 해남군 조차 거주 인구가 매년 줄고 있다.
153개 공공기관을 세종시와 10개 지방 혁신도시로 옮겼으나 이전 작업이 끝나기 무섭게 2017년부터 4년간 수도권 인구는 25만명이 순증(純增)했다. 올해부터 10년간 정부가 투입하는 9조 7500억원의 ‘지방소멸 대응기금’ 성공도 미지수이다. 구멍 난 독에 물 붓기처럼, 정부의 ‘지역’ 지원 사업은 효과를 못 낸 채 표류하고 있다.
◇도심에 기업 본사 유치
이런 상황에서 취재에 응한 전문가들은 기업과 베이비부머 유치, 지역의 혁신 세 가지를 전략적 카드로 꼽았다. 먼저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가 2만여명 규모의 브베시(市)에, 폭스바겐이 인구 12만명의 소도시 볼프스부르크에 본사를 두는 것 같은 사례가 생겨야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수도권이 청년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데다, 사기업의 지방행(行)을 강제할 수 없어서다. 이두희 산업연구원(KIET) 박사는 “허허벌판 외곽에 공짜 부지와 감세(減稅) 혜택을 왕창 주면 기업이 오는 시대는 끝났다. 지방의 도심 최고 요지에 기업이 본사를 옮겨 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기업이 원하는 목좋은 곳을 지자체와 공동개발하거나 기업에 개발권까지 줘 그들이 수익을 내며 근로자에게 아파트 특별공급도 해주는 식의 파격적인 발상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박재영 광주전남연구원장은 “기업이 지방으로 가면 직원들도 따라간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며 “서울 강남, 경기 판교처럼 복합쇼핑몰과 교육·문화·여가시설이 밀집한 혁신적 융복합 공간이 지방에 있어야 청년들이 정착하고 결혼도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유력 기업 본사 한 곳이라도 지역으로 옮겨 ‘수도권 불패(不敗) 신화’를 깨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440만 베이비부머 공략
1차(1955~63년 출생)와 2차(1968~74년)를 합해 1700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도 공략 포인트이다. 특히 지방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거주하는 440만명의 베이비부머가 유력하다. 이들 중 10~20%만 귀향해도 상당한 파급이 예상된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베이비부머야말로 생산과 소비 측면에서 지방 중소도시와 시골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이라며 “명확한 경제적 이득을 안겨줘야 이들이 지방으로 온다”고 했다. 일례로 베이비부머들이 수도권에 실(實)거주하지 않더라도 주택연금 자격을 부여하고, 자녀에게 주택 등을 증여할 때 세금을 낮춰주는 방안 등이 가능하다.
수도권의 베이비부머들이 지방으로 가면, 수도권 임대차 주택 시장에 10만~20만호가 새로 나와 전월세 및 매매 가격 하향안정 효과도 생긴다. 김현호 한국지방행정연구원 박사는 “독일 국민의 25% 정도가 갖고 있는 ‘복수(複數)주소제’를 우리도 도입한다면, 베이비부머의 귀향 활성화로 지자체 인구와 세금 수입이 늘어 지방 경제에 큰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매력 소도시’로 탈바꿈
마지막 카드는 인구 5만~10만명의 지방 소도시들이 자기 지역의 필살기(必殺技)를 살려 매력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 지방 중소도시 공무원과 주민들은 ‘손님’인 기업과 도시민들에게 텃세를 부리며, 포용성이 결여된 배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는 “중소도시가 진짜 부흥하려면 옛 영광에 기반한 지방 토호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고객 지향적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했다. 외부인들이 찾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이 되면 생활 인구가 확보되고 인구 유출도 억제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1주일 중 도시와 촌에서 4일, 3일씩 생활하는 ‘4도(都)3촌(村)’, ‘한 달 살기’ 같은 라이프스타일 변화 프로그램과 도시·지방 교류 활성화도 필요하다. 지방에 대한 친밀감 형성이 목표인 일본의 농산어촌(農山漁村) 체험과정에는 79만명의 초중고생이 참여했다. 차미숙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기전의 각오로 지방으로 옮겨올만한 ‘사람’들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달 임시국회서 ‘지방소멸 대응 특별법’ 꼭 통과되어야”
강보영 대한민국시도민연합회 회장
“수도권 일극화(一極化)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2040년에는 전남과 경북의 거의 모든 시·군이 사라집니다. 이제는 국가 차원의 마스터 플랜과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정책의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합니다.”
강보영 ‘대한민국 시도민(市道民) 연합회’(약칭 대도연) 회장의 말이다. 그는 전국 7개도 및 4개 광역시 향우회 회장들과 함께 2019년 5월부터 50여차례 토론회 등을 열어 지방소멸 해법 의견을 수렴해 작년 하반기 특별법안 초안을 국회에 전달했다. 2019년 출범한 대도연은 전국 11개 시도민회를 회원사로 두고 있다.
“대도연의 법안을 토대로 서영교 의원과 추경호 의원 등이 작년 11월 ‘지방소멸 대응 특별법안’을 사흘 간격으로 각각 대표발의했고, 이 두 법안에 국회의원 131명이 참여했어요. 작년 12월 말 ‘지방소멸 대응 특별법안 국회발의 보고회’에는 여야 대선 후보들이 모두 참석해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대도연은 특별법안에서 대통령 직속 ‘지방소멸대응 국가특별위원회’를 설치해 5년 마다 중앙정부가 지방소멸 대응 국가전략계획과 부문별 계획을 수립·시행토록 했다. 위원장은 대통령과 총리가 위촉한 인사 2명이 맡고, 위원은 주요 부처 장관과 민간인 등 30명 이내로 했다.
‘소멸위기 특별 지역’에 전입하는 주민에게 각종 세금 감면과 건강보험료·기초연금 지원 특례를, 이전(移轉) 기업에는 법인세·취득세 감면과 기업상속 요건 완화, 대학 등록금 감면 같은 혜택 제공도 담았다.
강 회장은 “병합심사를 거쳐 올 4월 임시국회에서 지방소멸 대응법안이 최우선 국가 과제로 선정돼 통과되길 바란다”며 “법이 제정돼 예산과 인력을 갖고 지방을 위해 실제로 일하는 기관이 있어야 지방소멸을 막고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도 줄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