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윤석열 당선인 뒤에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윤 당선인은 당선 이후 거의 모든 언급에서 ‘국민’과 ‘통합’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일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왔기에 이번 대선을 통해 ‘국민’의 의미와 ‘통합’의 무게를 새삼 깊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레토릭이 아닌 현실에서 ‘국민’과 ‘통합’은 진부하게 들리기도 한다. ‘국민’은 많은 정치인이 입만 열면 습관처럼 거론한 단어이고 때로는 독재자들이 더 많이 애용한 용어이기에 식상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국민’은 매사에 일일이 심판자가 될 수 없고 매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현실 정치에서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국민은 여럿일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국민이 대립적이고 충돌적이라는 데 있다. 지도자는 그중 어느 ‘국민’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대립하는 국민 쪽을 배척할 수도 없다. ‘국민’은 하나가 아닐 뿐 아니라 언제나 당신의 우군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꾸 국민을 들먹이고 물어보면 궁극적으로 자신감이 없음을 드러낸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 국민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을 뽑아줬으니 이제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 성적표는 5년 후에 받아라.’
민주주의 지도자의 또 다른 숙명은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터득하는 것이다. 2020년대 대한민국이 당면한 국내적·국제적 환경은 어떤 것이며,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이끌어갈 지침은 어떤 것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정치’가 넘쳐나고 ‘정치인’이 천지사방에 깔린 나라에서 왜 무엇이 ‘검사’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렸는지를 숙고하는 일이다. 윤석열에 대한 시대적 요청은 앞선 5년의 잘못된 리더십에 오염된 나라가 더 망가지기 전에 바로잡으라는 국민의 명령이다. ‘좋은 대통령’ ‘훌륭한 대통령’ 모두 좋다. 그러나 그에 우선하는 것은 좌파 5년을 바로잡고 헌법에 따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나라의 에너지 정책, 부동산 정책, 기업의 자율, 대북·대중 정책과 동맹 정책을 총괄하는 외교·안보 노선 등을 바로잡아 재설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적 신념을 저해해온 각종 사회 권력을 정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민노총·전교조·참여연대 등 이른바 사회 권력 이동이 수반하지 않은, 정치권력만의 독자적 장악으로는 명실상부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대선에서 국민은 윤석열을 뽑은 것이라기보다 정권 교체를 명(命)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 교체는 좌파 정권의 근간이 돼 온 사회 권력을 되돌려놓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변화가 결단력 있게 수반되지 않는 한, 좌파 단체들은 앞으로 5년간 윤 정부를 사사건건 괴롭힐 것이고 5년 후에 정권을 다시 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윤석열 정권이 받은 시대적 사명은 문재인 5년을 ‘청소’하라는 것이다. 정치 보복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적폐 청산을 하라는 것이다. 지난 정권의 내로남불, 인사 불공정, 권력 남용 등을 징벌해서 다시는 그런 적폐가 용인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절실하다. 국민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불법’을 그냥 넘기는 것은 안 된다. 다만 철저한 사실 검증과 법 절차에 따라 권력 개입 없이 문책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 정권과 다를 것이 없다.
윤 당선인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바로잡고 싶은 열정에 불타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아니 세계의 모든 대통령이 당선 초기에는 다 그랬다. 하지만 약속을 남발하면 자칫 국민에게 헛된 희망(false hope)만 주고 일은 엉망이 되기 쉽다.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집중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0.73%p 차 대통령’이라는 딱지가 번번이 그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170석 넘는 민주당 의석도 사사건건 윤 정부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윤 당선인에게도 ‘무기’는 있다. 엄밀히 말해 윤석열은 정치인이 아니다. 정당인도 아니다. 체질이 다르다. 그야말로 ‘어쩌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제도와 법이 허용하는 한, 소신대로 대통령 노릇 하고 물러가면 된다. 부담 없이 ‘윤석열다운 정치’를 한번 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