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yFdtYHUqmog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786년 음력 1월 22일 정조는 창덕궁 인정문 앞에서 국정개혁안 보고회를 열었다. 이름하여 ‘병오소회(丙午所懷)’다. 학문에 관해서 정조는 대사헌 김이소와 대사간 심풍지가 제안한 개혁안을 채택했다. ‘중국 서적 수입 금지’와 ‘중국인과 교류 금지’였다. 공무원 감찰과 고발을 맡은 사헌부 수장과 간쟁을 책임지는 사간원 기관장이 강력하게 주장한 ‘개혁’ 조치였다.(2022년 4월 13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297.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① 1786년 병오소회(丙午所懷)’ 참조)
그런데 애당초 정조는 이 학술 교류 금지책을 염두에 뒀던 듯하다. 정조는 병오소회 바로 전날 이 김이소와 심풍지를 대사헌과 대사간에 임명했다. 조정에서 가장 ‘말발’이 센 자리에 앉혀 놓은 뒤,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들 입으로 대신 하게 만든 것이다. 박제가를 비롯해 부국(富國)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으나 정조는 채택하지 않았다.
이로써 외부로부터 신문물이 도입될 통로는 공식적으로 차단됐다. 그리고 6년 뒤 정조가 이렇게 선언한다.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치고(頓革舊體·돈혁구체) 금하라.”(1792년 음 10월 19일 ‘정조실록’) 1792년 양력 12월 2일, 조선 왕조에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사라진 날이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9. 조선 학문의 종말 선언② 문체반정과 백탑파의 몰락
백탑파의 우정 그리고 날벼락
개혁안이 거부된 박제가는 ‘백탑파’ 학자였다. 백탑파는 연산군이 철거한 서울 원각사지(현 탑골공원) 흰 탑에서 따온 명칭이다. 연암 박지원이 전의감동(종로타워 근처)에 살았는데 박지원과 또 다른 개혁파 학자 홍대용이 이끌던 학자 무리를 백탑파라 불렀다. 백탑 주변에 살던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이서구 같은 사람들과 남산골에서 이들을 즐겨 찾아갔던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가 그 백탑파다. 청나라 여행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한번 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내며’(박제가, ‘정유각문집’1, 백탑청연집서) 새 세상을 설계해갔다. 사탕을 좋아했던 이덕무는 “박제가가 우리 집에서 내 사탕을 훔쳐 먹는다”고 이서구에게 고자질을 하기도 했고(이덕무, ‘청장관전서’, 아정유고6 이서구에게 주는 편지) 박제가는 친구들에게 개 삶는 법을 가르치며 몸보신을 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정약용, ‘다산시문집’ 20,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 술과 음식을 장만해 밤을 꼬박 새우면 서로 지은 글로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였다.(박제가, 위 글)
그런데 1792년 겨울날, 이 백탑파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정조가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따져 보면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熱河日記·1780)’를 내가 익히 보았으니 속일 수 없다. 박지원은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是漏網之大者·시루망지대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결자해지하라.”(박지원, ‘연암집’2, 연상각선본 ‘남공철에게 답하는 편지’) 우아한 고문(古文)을 버리고 저급한 문체로 저급한 내용을 담은 청나라 패관잡기를 퍼뜨린 거물이 박지원이라는 뜻이었다. 박지원만이 아니었다. 청나라 선진 문명 도입을 주장하던 백탑파 전원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정조는 “반성문을 쓰면 홍문관 제학에 제수하겠다”며 문체 전향을 유도했지만 당시 안의현감 박지원은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건 신하된 자의 큰 죄”라며 반성을 거부했다.(박종채, ‘과정록’2) 대신 1799년 서울 가회동에 살 때 박지원은 ‘과농소초’라는 농업 정책 제안서를 정조에게 헌상했다. 정조는 “경륜을 펼친 좋은 책을 얻었다”라며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열하일기에서 번뜩이던 비수 같은 문제의식과 문체는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박종채, ‘과정록’3)
가속화된 학문 탄압
1791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 사는 남인 윤지충이 서학(西學)을 신봉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첩보가 올라왔다. 노론 계열에서 서학 교도들을 박멸하자는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일부 연루자들은 처형한 뒤 정조는 서학을 ‘발본색원’할 방안을 내놨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느슨한 것 같아도 더 쉽다. 서학을 금하기 위해 패관잡기부터 금지한다.” 그리고 정조가 제안했다. “패관잡기로 쓴 모든 책들을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넣으면 어떨까.”(1791년 음10월 24일 ‘정조실록’)
다음 달 12일 홍문관 수찬 윤광보가 “정학(正學)을 밝혀 사설(邪說)을 물리치시라”며 홍문관에 있는 서양 책들을 큰 거리에서 태워버리라고 상소했다. 정조가 답했다. “멀리까지 내갈 일이 있겠는가. 즉시 홍문관에서 태워버려라.”(1791년 11월 12일 ‘정조실록’)
분서(焚書)를 제안하던 날 정조는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남인을 제거하려는 노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학문의 자유를 희생시킨 것이다.
1792년 음력 3월 24일 경상도 안동 도산서원에서 이황 별세 222주년 기념 특별과거시험이 열렸다. 경상도 유생 7228명이 응시했다. 영의정 채제공이 이를 기념하는 비문을 지었다. 비문 내용은 이러했다. ‘서학이 동방으로 흘러와 서울과 경기까지 퍼졌으나 유독 영남은 한 사람도 오염되지 않았다. 주상께서 “퇴계가 남긴 교화”라며 감탄하셨다(上歎·상탄).’(채제공, ‘번암선생집’ 57, 도산시사단비명)
그리고 그해 10월 정조는 공식적으로 패관잡기를 엄금하는 문체반정을 선언했다. “완전히 뜯어고치라.”(1792년 음10월 19일 ‘정조실록’) 닷새 뒤 패관체를 쓰는 초계문신 남공철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반성문 또한 ‘잡소리를 늘어놓은’ 남공철은 장 70대를 선고받고 이를 돈으로 대신 때웠다. 돈은 정조가 ‘바른 문체’라고 칭찬한 규장각 동료 성대중 칭찬 잔치 비용으로 사용됐다.(1792년 음12월 24일 ‘일성록’) 낭패를 본 남공철은 곧바로 “임금이 당신이 주범이랍디다”라고 박지원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정조는 5년 전인 1787년 패관소설을 읽다가 적발됐던 김조순과 이상황에게 반성문을 받으라고 명했다. 마침 청나라 사신으로 뽑혀 북상 중이던 김조순은 허겁지겁 5년 전 일을 반성하는 글을 조정에 보냈다. 반성문을 본 정조가 이리 말했다.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고 뜻이 풍부하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고 밤 깊은 줄도 모르게 무릎을 치곤 했다.”(1792년 11월 3일, 8일 ‘정조실록’) 훗날 김조순은 패관잡기 유통 주범인 박지원을 이렇게 비난했다. “박지원은 맹자 한 장을 읽으라고 시키면 한 구절도 못 읽을 거다.”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백탑파 관료 서유구가 박지원을 두둔하자 김조순이 이리 답했다. “그대가 이 정도까지 문장을 모르는구나. 내가 있는 동안 홍문관과 예문관에 근무할 생각 말라.”(홍길주, ‘수여난필(睡餘瀾筆)’: 정민, ‘비슷한 것은 가짜다’, 태학사, 2020, 재인용)
백탑파의 몰락, 학문의 종언
18세기 개혁 사상을 대표한 학파는 북학파요 백탑파다. 오랑캐로 멸시했던 청나라에서 서양 학문과 과학과 신문물을 목격하고 이를 조선에도 구현하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진 학자와 관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향한 그 신문물이 왕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됐다. 그 왕은 1798년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만 갈래 강을 비추는 밝은 달의 주인)’이라 부르며 세상 모든 학문의 원천이라고 선언했다.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던 백탑파는 활동을 중단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지방에 발령이 나 뿔뿔이 흩어졌다. 안의현감에 임용돼 경상도로 내려간 박지원이 처남 이재성에게 편지를 쓴다. “수십 년 긴 세월, 떼 지어 노닐던 옛 친구들이 거의 다 죽어 하룻밤 우스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대신 전혀 모르던 사람이 튀어나와 나를 오랑캐라고 욕지거리를 늘어놓는다.”(박지원, ‘연암집’2 연상각선본 ‘이재성에게 답함’)
“이덕무, 박제가 무리는 문체가 전적으로 패관과 소품에서 나왔다.”(정조, ‘홍재전서’ 일득록 5 문학 5) 백탑파 관리들은 하나같이 반성문 제출을 명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조는 본심을 드러냈다. “이들을 규장각에 뒀다고 내가 그 문장을 좋아하는 줄 아는가. 이들이 서얼 출신으로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둔 것이다. 나는 실로 이들을 배우로서 기른다(予實俳畜之, 여실배축지).”
문체반정이 공식 선언되고 석 달 뒤, 1793년 정월 25일 아침 이덕무가 죽었다. 죽기 전날까지 반성문 작성을 고민하다가 글을 쓰지 못하고 죽었다.(‘청장관전서’ 간본 아정유고 8, ‘선고부군(先考府君)의 유사(遺事)’) 이덕무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의현감 박지원은 “마치 내가 죽은 거 같다”라고 슬퍼했다. 그리고 맑은 대나무숲에 자리를 깔고 술상을 차린 뒤 ‘꿈속에 찾아온 죽은 옛 벗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박종채, ‘과정록’3) 박지원은 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를 촛불 아래 밤새우게 만들고 패관체 몸통 박지원을 비난했던 김조순은 훗날 정조 사돈이 됐다. 죽기 직전 정조가 아들을 맡긴 것이다. 나라를 맡긴 것이다. 순조 장인으로서, 김조순은 세도정치 시대를 연 권력가가 됐다. 그리고 1803년 백탑파의 상징인 희디흰 원각사지 탑이 보이는 산중에서 훈련대장 김조순 휘하 무관(武官) 108명이 시회(詩會)를 열었다. 그 풍경을 그린 그림과 글이 남아 있다. 제목은 ‘탑동연첩(塔洞宴帖)’이다.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님께서 특별히 은택을 베푸시니, 죽을 곳을 알지 못할 지경이다(不知死所 부지사소).’
학문의 몰락, 국가의 몰락
1805년 박지원이 죽었다. 1829년 아들 박종채가 편집해둔 ‘연암집’을 효명세자가 빌려갔다. 효명세자는 개혁을 주도하던 권력자였다. 그런데 이듬해 그 왕자가 요절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반환된 책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강구한 대목들’에 종이가 접혀 있었다.(박종채, ‘과정록’4)
아들 종채도, 손자 박규수도 ‘유림의 비방을 의식해’ 연암집을 출판하지 못했다.(김택영, ‘중편연암집’, ‘박지원 연보’, 1916) 연암집이 세상에 나온 때는 1900년이다. 이 또한 책을 낸 사학자 김택영이 ‘패관잡기’로 규정한 글들은 제외됐다.(김영진, ‘박지원의 필사본 소집들과 자편고 연상각집 및 그 계열본에 대하여’, 동양학 48집, 단국대동양학연구소, 2010) 그래도 개화파 지식인 김윤식은 “당세에 쓰이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백 년 후까지 남겨둬 원대한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김윤식, ‘운양집’ 10, 연암집 서문, 1902)
동시대에 살았던 정약용의 방대한 저서들이 출판된 때도 1902년이었다. 같은 백탑파 서유구가 쓴 산업 백과사전 ‘임원경제지’는 무려 1966년에야 서울대에서 영인본으로 첫 출간됐다. 문체반정 이후 이용후생과 부국강병책을 담은 책들이 암흑 속에 묻혔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에는 서양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각오를 가진 인사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정신 자세가 훈련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1, ‘근대과학시대’) 조선은 ‘유교의 교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과학 정신이 없는 나라’로 몰락했고(모리스 쿠랑, ‘조선문화사서설’(1896), 김수경 역, 범우사, 1995, p136) ‘일본의 상대(上代)를 밝혀준 나라’에서 ‘주자 외에는 영웅호걸을 아는 자가 없는 나라’로 전락해 있었다.(혼마 규스케, ‘조선잡기’(1894), 최혜주 역, 김영사, 2008, p24, 181)
박지원은 말년에 아들 종채에게 여덟 글자를 써준 적이 있었다. ‘因循姑息 苟且彌縫(인순고식 구차미봉)’. 인습을 못 벗어나고 눈앞의 편안함만 좇으면서 땜질하는 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리 일렀다.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박종채, ‘과정록’4) 갑신정변(1884) 주역 가운데 한 명인 박영효는 이렇게 기억했다. “박규수 대감 집에서 연암집을 읽으며 귀족을 통박하는 세계관을 배웠다.”(이광수, ‘갑신정변회고담, 박영효씨를 만난 이야기’, 1931년 3월 1일 ‘동광’ 19호) 이 ‘박규수 대감’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 이어져온 백탑파의 개혁성이 갑신정변으로 폭발한 것이니, 학문을 말살한 문체반정이 없었다면 개혁가들이 꿈꿨던 세상은 얼마나 앞당겨졌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