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2회>
2022년 7월 정저우 1000여명 시민, 은행예금 동결조치 규탄 시위
2022년 7월 10일, 중국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중국인민은행” 건물 앞 계단 위에 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서 지방은행의 예금 동결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정부의 부패와 무책임을 규탄하며 “예금은 인권이다!”란 현수막을 펼쳐 들고 “예금을 돌려 달라!” 소리쳤다. 그날 오전 11시경 흰색 셔츠를 입은 정체불명의 남성들이 현장을 덮치고 무차별 폭력을 가해서 시위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중국 밖 민주주의 사회의 관점에선 지방 도시의 소규모 시위 정도로 폄하될 수도 있겠지만, 중국의 현실에선 철옹성의 방화벽에 생겨난 섬뜩한 균열의 조짐일 수도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제로 코로나”의 광풍 속에서 인민의 권리 주장을 극도로 제한하고 방역 정치를 2년 넘게 이어가고 있다. 높은 이자율을 보장하며 지방민의 쌈짓돈을 끌어모은 지방의 작은 은행들은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중국 전체가 경제난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결국 지난 4월부터 허난성에서 자금난에 시달려 온 촌진(村鎭, 시골과 소도시) 은행들은 수십억 원 대의 예금을 동결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격분한 예금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인터넷 공간을 활용해서 예금 동결의 부당함을 알리는 여론전을 이끌었다. 중국 정부는 해시태그를 삭제하면서 여론의 확산을 막았지만, 예금주들은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새로운 해시태그를 만들면서 홍보전을 이어갔다.
두 달 넘는 분투 끝에 시민들은 마침내 공안의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1천여 명이 모이는 쾌거를 연출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현수막 중엔 암흑세계와 손잡은 지방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도 있었다. 실제로 문제가 된 촌진(村鎭, 시골 및 소도시) 은행은 현재 암흑가 검은 세력과 결탁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 점에서 이번 사태는 비단 허베이성이나 안후이(安徽)성뿐만 아니라 전 중국 금융 부패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오늘날 중국 금융 시스템의 근원적 불안전성이 표출되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시위는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민 개개인이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집단행동이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실제로 중국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에 관한 강력한 이의제기라 볼 수 있다. “예금은 인권이다!”라는 구호 속에는 인민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중국공산당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질타가 표현돼 있다.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 중국에서 인민에겐 오로지 예금만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인권의 보루이다. 그 보루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인민은 격분할 수밖에 없다. 비단 허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건 이후... 사유재산권 보장 약속하고 정치적 자유 박탈
사유재산권은 근대 민법의 출발점이다. 자유나 인권은 공허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에서 시작된다. <<정부론>>2편 제5장에서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논증하듯 모든 인간은 스스로 노동해서 획득한 재화를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천부(天賦)의 사유재산권을 갖는다. 로크에 따르면, “떡갈나무 아래서 도토리를 주워서, 숲속 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영양을 섭취한 사람은 바로 그 도토리와 사과를 직접 손으로 잡는 순간 그 두 열매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갖게 된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공중앙과 중국 인민 사이에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다. 탱크로 시위군중을 짓밟은 중공중앙은 인민을 향해 경제적 보상을 약속했다. 중국 인민은 그 반대급부로 정치적 자유를 헌납했다. 입 닫고 일당독재에 복종하는 대신 중국 인민은 현실적으로 돈을 벌고 모을 수 있는 경제적 자유의 길을 택했다. “공민의 합법적 사유재산은 침해될 수 없다”는 1982년 수정 헌법의 총강 제13조가 형식적으로 공민의 사유재산권을 지켜 주는 헌법적 근거가 되었다. “치부광영(致富光榮,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는 최고영도자 덩샤오핑의 슬로건은 공민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중공중앙의 정치적 보증이었다.
톈안먼 대학살 이후 중국 인민은 비록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일해서 번 돈과 재투자로 불린 재산만큼은 1950-60년대처럼 무력하게 강탈당하지 않고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지난 7월 10일 정저우 “중국인민은행” 앞의 시위는 정부와 인민 사이의 암묵적 합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탄이다. 최근 시진핑 총서기와 리커창 총리가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구호 역시도 사유재산권을 위협하는 “좌 클릭”의 노이즈(noise)라 여겨지고 있다.
요컨대 바로 지금 많은 중국 인민은 은행에 넣어 둔 쌈짓돈까지도 불시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 수밖에 없게 됐다. 이번 시위가 다른 어떤 시위보다 심각한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중국공산당이 외쳐대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모두 허울 좋은 거대명분일 뿐이다. 중국 인민이 일당독재에 복종했던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최소한 인민의 사유재산권만큼은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 바로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자유인”의 대탈주가 일어날 수 있다. 1950년대처럼 다시 재산을 빼앗기면 인민은 자유를 잃고 다시 국가의 농노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유재산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 깨져...정저우 시위가 심각한 이유
정저우 시위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언제, 왜 봉기하는가(When men revolt and why)?” 사람들은 과연 언제 정부의 권력에 대한 승인과 복종을 철회하는가? 사람들은 과연 왜 막강한 정부의 무력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봉기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이 질문은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가장 원초적이고도 중대한 사회과학적 물음이다.
국가의 권위가 살아 있는 “정상 정치(normal politics)” 상황에서는 공권력에 도전하는 모든 위법, 탈법, 불법 행위는 당연히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반면 국가의 권위가 의심받는 “분쟁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상황에서는 정부가 휘두르는 공권력 자체가 심각한 불법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다.
“분쟁 정치”의 상황이 발생하면, 민주정권은 대체로 정치적 타협책을 모색하지만, 독재정권은 대체로 군경을 동원해서 분쟁의 주체들을 탄압하고 처벌하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한다. 민주정권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국민주권과 권력 분립을 명시한 입헌주의의 제약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권력 분립을 부정하고 인권을 하는 독재정권은 군경의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고 군경의 이탈과 반란이 초래되면, 독재정권 자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지만, 군경만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면 이론상 독재정권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도 있다.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군사 국가에서는 인민의 저항이 쉽게 정치 투쟁으로 확대될 수 없다. 칼을 든 강도와는 맞서 싸울 수도 있지만, 기관총을 쏘아대는 갱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1989년 톈안먼 대학살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권력 유지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저항하면 죽는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평화적 시위까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장 로스땅드(Jean Rostand, 1894-1977)이 말했듯,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수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가 되고, 다 죽이면 신이 된다.”
그러한 공포 증후군이었을까? 얼마 전 중국 밖의 SNS에선 정저우의 시위 진압을 중국 정부가 정저우시에 탱크부대가 급파했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퍼졌다. 결국 이 소문은 해군 기지가 있는 산둥 르자오(日照)시에서 찍힌 동영상을 근거로 퍼져나간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중국 붕괴를 바라는 사람들의 음모이거나 중국의 변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착시였겠지만, 적어도 그 밑바탕에 1989년 대학살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살의 트라우마...톈안먼의 나비 효과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이 자행된 직후, 전 세계 언론은 앞다퉈 그 참혹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그해 4월 중순부터 시작된 베이징의 민주화 시위에 이미 두 달 넘게 세계인의 이목이 쏠려 있는 상태였다. 5월 15일-18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의 방중(訪中)을 앞두고 구미 언론사는 경쟁적으로 취재진을 급파했다.
중공중앙은 외국의 취재진의 활동을 제약하고 감시했지만 기자들의 취재 본능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기자들은 호텔 발코니에서 커튼 틈으로 카메라 들이대고 망원 렌즈로 도심의 광경을 촬영한 후, 불시에 들이닥칠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기민하게 필름을 숨겨야만 했다.
6월 5일 월요일 이른 아침 서울의 바쁜 출근길 시내버스 스피커에서도 전날 베이징의 심장부를 강타한 총성이 “탕, 탕, 탕, 탕” 울려 퍼졌다. 그 총소리를 배경으로 깔고 톈안먼 대학살을 보도하는 기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여러분은 지금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군대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하던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총성을 듣고 계십니다!”
톈안먼 대학살은 그렇게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공연히 자행된 중공중앙의 야만적 폭거였다. 실시간으로 참혹한 학살의 영상이 방영되자 전 세계에선 중공중앙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졌다. 중공중앙은 국제사회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를 닫은 채로 인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독재 권력은 늘 그렇게 외부 세계의 정당한 항의와 압박을 제국주의적 “내정간섭”이라며 빠져나간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짓밟으면서 “민족해방”이나 “계급투쟁” 등 집단주의의 구호를 외쳐댄다. 영어권에서 흔히 인용되는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명언처럼,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다(Patriotism is the last refuge of the scoundrel)!”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