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44회>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베이징대 로스쿨 장첸판 교수
일전에 한국의 한 헌법학자가 물었다. “중국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하고 헌법을 통해 국가권력 제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이 없나요? 중국처럼 큰 나라라면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분명히 있을 텐데,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서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저명한 헌법학자 장첸판(張千帆, 1964- ) 교수가 떠올랐다. 2011년 9월 27일 베이징 대학 로스쿨에서 장첸판 교수는 “신해혁명과 중국 헌정(憲政)”이라는 제목 아래 강연을 했다.
여기서 헌정이란 헌법에 근거한, 헌법의 통치, 곧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의미한다. 시진핑 정권이 상용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법에 의(依)한 지배(rule by law)”라 할 수 있다. “법의 지배”란 법의 정신을 구현하는 입헌주의의 요체이지만,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을 구실삼아 인민을 통제하는 독재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2011년 당시 장첸판 교수는 이미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제성을 비판한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날 장 교수의 강연은 시쳇말로 ‘대박’이었다. 큰 강의실에 앉을 자리가 없어 강의실 문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서서 강연을 듣는 학생들도 있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학생들을 보면서 장 교수는 온화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강연의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2주 쯤 후면 신해혁명 100주년이 됩니다. 모두가 신해혁명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베이징 대학에서 말할 수 없다면, 누가 어디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베이징 대학이 이 주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베이징 대학의 치욕(恥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 강연의 주제는 바로 치욕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베이징 대학이 치욕이 없어서 좋았는데, 이번에 베이징 대학 당국은 저명한 역사학자 위안웨이스(袁偉時, 1931- ) 교수의 ‘신해혁명 100년 헌정’과 같은 강의를 허용했어야 합니다. 실상 위안 교수는 저보다도 훨씬 더 온건합니다.”
이어서 장 교수는 말로 하면 격해질 수 있기에 마음속의 생각을 글로 써왔다며 준비된 원고를 낭독했다. 첫머리부터 장 교수는 명징한 문장으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황제체제 무너뜨린 신해혁명 100년 지났지만 중국은 아직도 전제 정권”
“2011년 신해혁명이 황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100년이 지났지만, 중국은 아직도 관료부패와 사회위기에 빠져 있다. 우창(武昌) 병변(兵變)은 쓰러져가는 대청제국을 무너뜨리고 수천 년 황권 통치를 종식했지만, 황권의 종결은 진정한 공화의 시작이 아니었다. 100년 동안 중국은 전란에 휩싸이고 생령(生靈,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인민은 반복해서 호겁(浩劫, 커다란 겁탈)을 겪었으며, 헌정의 운명은 기구했다.”
장 교수는 신해혁명 이후 100년을 “민권(民權)은 신장되지 않고 공권(公權)만 무한 팽창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100년 전 “제국(帝國, 황제의 나라)”을 무너뜨리고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을 세웠는데, 대륙은 지금도 전제정권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장 교수는 비장한 어조로 헌정의 당위를 역설했다.
“지난 100년의 풍파와 앞날의 불행은 모두 인민을 노예로 부리는 전제(專制, 독재 제도)에서 기인한다. 전제는 참으로 교활하고 완고하다. 혁명을 일으켜도 타파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혁명은 왕왕 더욱 강대한 폭정을 낳는다. 청제국의 멸망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때에 맞춰 헌정 개혁을 시행해야만 혁명의 비극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집정자가 미욱해서 깨닫지 못하고, 개혁을 거절하면 불을 갖고 놀다 스스로를 태우는 데 머물지 않고, 중국 사회 전체가 혁명과 폭정의 악순환에 빨려들어 간다. 중화민족의 문명은 문란해진다. 부패가 횡행한다. 자원이 고갈된다. 환경이 파괴된다. 급기야 인민은 안심하고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백년 역사가 충분히 증명한다. 오직 헌정(憲政)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
장 교수는 헌정의 실현을 위해선 전제를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헌정은 독재를 막고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법의 지배”를 이른다.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해선 법 위에 군림하는 전제적 지배자들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장 교수는 그 주체가 인민이라 주장한다. 주권재민의 원칙을 쉽고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제를 타파하기 위해선 반드시 인민에 의존해야 한다. 헌정을 세우기 위해서 인민은 스스로의 존엄을 확립해야 한다. 개인의 존엄은 국가 헌정의 기본 조건이다.······ 전제의 가장 큰 죄악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박탈하여 개개인이 스스로 기꺼이 타락하여 음험한 전제 권력에 복종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장 교수는 간명한 언어로 입헌 자유주의(constitutional liberalism)의 핵심 논리를 설파했다. 요컨대 헌정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존엄성을 갖는 인간 개개인이다. 기본권을 보장받은 자유로운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만 헌정이 실현될 수 있다.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은 전제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그 전제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고선 인간의 존엄이 확립될 수 없다. 신해혁명 이후 100년의 과정에서 중국은 극심한 전쟁의 폐해와 혁명의 광란을 겪었음에도 인간 존엄은 여전히 요원한 꿈이다. 바로 중국공산당이 헌법 위에 군림하며 전제적인 통치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장첸판 교수의 마오쩌둥 비판 “헌정 파괴자, 치욕의 기둥에 적어야”
강연 막바지에서 장 교수는 비장한 어조로 다음 문장을 낭독했다.
“진보를 압살하고, 인민에 대항하고, 헌정을 억압하고, 개혁을 거절한 자는 아무리 그가 생전에 스스로를 신성한 지위에 봉했다 할지라도 중국 역사의 치욕을 적는 기둥에 영원히 그 이름을 새겨 넣어야만 한다.” (동영상, 1시간 42분 46-56초)
이 문장을 읽고 나자 약 2-3초 정도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 교수가 잠시 한 모금 물을 마시자 학생들은 갑자기 반사적으로 뜨거운 손뼉을 쳤다. 연사와 청중이 자발적으로 주고받은 미묘한 대화였다. 장 교수는 왜 바로 그때 물을 마셨을까? 청중이 보인 그 짧은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전에 스스로를 신성한 지위에 봉한” 자는 누구일까?
물론 장 교수는 마오쩌둥의 실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오쩌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마도 학생들은 장 교수가 중국현대사의 “인격신” 마오쩌둥을 “진보를 압살하고 인민에 대항하고 헌정을 억압하고 개혁을 거절한 자”라고 비판했음을 자각하고는 짧은 찰라 당황했던 듯하다. 감동을 손뼉으로 표현하기까지는 대략 2-3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사 그 어떤 황제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린 일인지배의 화신이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헌정을 억압하고 민국의 꿈을 파괴한 전제군주였다. 그는 살아서 스스로를 신격화했지만, 장 교수는 당당하게 그 이름자를 역사의 치욕을 기록하는 기둥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장 교수는 헌정의 실현을 위한 중국 인민의 궐기를 촉구하는 말로 강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모든 중국인이 일어나서 개인의 존엄과 후대의 행복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고, 자신의 양지(良知)와 용기를 발휘하여 공평하고 정의로운 국가 질서를 창조하고, 스스로 각성과 행동을 통해서 중화문명에 비치는 헌정의 서광을 맞이하자! 한국, 대만, 구소련, 동구, 남아프리카, 칠레, 인도네시아, 태국, 네팔,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의 인민이 할 수 있다면, 중국 인민도 반드시 할 수 있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큰 박수를 보냈다. 한국, 대만은 민중이 자발적 노력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한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2011년 봄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에 민주화의 열풍이 불었다. 장 교수는 바로 그 “아랍의 봄”을 의식하고 중국 인민도 역시 전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영상 밑에 달린 댓글 중에는 다음 구절이 눈에 띈다.
“장 첸판 교수가 2011년 9월 이 강연을 할 때, 일존(一尊, 시진핑)은 아직 국가주석이 아니었다. 10년의 과거를 돌아보면, 장 교수가 했던 말이 오늘날 한 치의 차이도 없이 100% 실현됐다. 그의 강단과 혜안에 존경을 표한다. 당시의 학생들은 이제 30세 전후가 되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극심한 국가적 타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당시는 후진타오(胡錦濤, 1942- )와 원자바오(溫家寶, 1942- )의 시대였다. 사상, 언론의 자유가 그래도 어느 정도 있었다. 만약 요즘 같았다면, [장 교수는] 탄압당하고 투옥됐을 것이다.”
장첸판, 미국서 물리학 박사학위 후 다시 정치이론으로 박사...로스쿨 교수로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장첸판 교수는 저명한 헌법학자다. 1980년 열여섯에 난징(南京)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1984년 스무 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9년 카네기멜런 대학(Carnegie-Mellon University)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재다. 2년 후 그는 어떤 이유에선지 미국의 메릴랜드 대학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비싼 등록금을 댈 수 없어 자퇴해야 했다. 그는 그 대학의 컴퓨터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주경야독하듯 로스쿨 수업을 청강했다. 이후 1995년-1999년 그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정치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2002년 난징 대학 로스쿨에서 교수가 되었고, 2003년 이래 베이징 대학 로스쿨의 교수가 되어 헌법학, 비교 헌법학, 중국 헌법 및 헌정 원리 등을 가르치며 연구해 왔다.
장 교수는 2010년대 초부터 중국공산당의 전제적 통치를 비판하면서 헌정(憲政) 담론에 불을 지핀 중국의 대표적인 헌법학자이다. 베이징 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칭화(淸華) 대학 로스쿨의 쉬장룬(許章潤, 1962- ) 교수 역시 2010년대 헌정 담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헌법학자이다.
2011년 9월 27일 장첸판 교수의 강연 영상은 이후 잠시 널리 퍼져나갔지만, 곧 모두 삭제되었다. 지금은 중국 내에선 볼 수 없는 유투브를 통해서만 장첸판 교수의 강연을 볼 수가 있다. 현재 중국의 대표적인 비디오 플랫폼에서는 장첸판 교수의 강연이나 인터뷰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시진핑 정권 출범 직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의 이론가들은 당시 활발하게 일어나던 헌정 담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 후로 장첸판 교수는 인터넷 매체나 대중강연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게 됐지만, 헌법학자로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계속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전제주의 통치라 비판하는 장첸판 교수를 시진핑 정부가 그대로 둘 리 없었다. 2019년 1월 말 중국 정법대학의 한 교수는 헌법학 교재가 “서방 가치관을 선전하고 사회주의를 조소한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장첸판 교수의 교과서 <<헌법학 도론>>을 정부 당국에 고발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중국의 모든 대학에서 이 책이 교과서로 사용될 수 없게 했다. 곧이어 이 책은 금서의 목록에 올랐고, 인터넷 서점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왜 장첸판 교수의 <<헌법학 도론(導論)>>에 금서의 낙인을 찍었을까? 중국공산당은 왜 장 교수를 두려워하는가? 장 교수의 명저 <<헌법학 도론>>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