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이한 장면이 김순호 행정안전부 신임 경찰국장을 겨냥한 야당과 재야 좌파의 ‘프락치 사냥’이다. 논점은 단순하다. 33년 전 주사파 운동권에서 공안 경찰이 된 김 국장의 변신 과정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동료를 배신하고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된 것 아니냐”며 “프락치 경력을 자백하라”고 한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모호한 말들 이외에 증거는 없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빨갱이 사냥’을 했다면 그들은 일치단결해 ‘색깔론’으로 역공을 퍼부었을 것이다.

프락치 사냥은 말로 끝내는 논쟁이 아니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씨가 3년 전 김명일 현 조선NS 기자와 가진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 실감할 수 있다.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 때 자료를 얻으려고 서울대에 갔다. 누군가 얘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아니라고 하자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씩 폭행했다.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부었다.” “전두환 전 씨라고 더 심하게 때렸다”는 증언에선 가해자들의 악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남의 신체에 고통을 주다 못해 인격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것이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구속된 유시민씨. 무고한 민간인을 상대로 감금, 고문, 인격 살인을 저질렀지만 수감 중 시종일관 당당했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법정에서 후회한 일도 사죄한 일도 없다. 가해자 대부분은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출세했고, 피해자는 프락치 낙인을 안고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았다.

서울대생을 부러워하는 방송대생, 공무원 시험 준비생, 재수생 등 4명이 피해자였다. 프락치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범인들은 1년 안팎의 징역형만 받았다. 법정에서 후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영웅 놀이를 했다. 유시민씨는 그때 얻은 명성을 발판으로 장관에 올랐다. 지상파 TV에 나와 당시 일을 자랑했다. 유시민은 노덕술, 이근안을 포함한 한국의 역대 고문 가해자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공범 윤호중씨는 민주당 원내대표, 이정우씨는 로펌 변호사, 백태웅씨는 미국 대학 로스쿨 교수가 됐다. 공범들은 유씨가 고마울 것이다. 그의 현란한 언행이 추악한 범죄를 민주주의 서사로 둔갑시키고, 일그러진 자화상에 민주 투사의 가면을 씌웠기 때문이다. 그들을 단호하게 단죄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도 계속되는 프락치 사냥이다.

김 국장의 이력을 보면 그가 왜 타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낮은 계급인 경장에서 시작해 장기간 공안 수사에 몸담았다.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 혁명 그룹 사건을 해결해 특진했고, 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동맹 사건을 해결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국의 좌익은 공안 경찰을 정보기관보다 더 증오한다고 한다. 좌파의 풀뿌리를 뽑아내 그들의 증식 공간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몸담았던 인노회 조직원들은 통일사회주의 혁명, 민족 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대법원이 이적 단체라고 했든 안 했든,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했다면 지금 한국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조직을 버리고 경찰로 전향한 것은 공격받을 일이 아니다. 설사 그들 주장대로 김 국장의 수사 협조 때문에 조직이 해체되고 조직원이 체포됐다고 가정해도 자유민주주의 기반 위에 존립하는 한국 국회가 그를 매도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프락치 사냥은 유시민으로 끝나지 않았다. 원조 사냥꾼이 영웅이 됐으니 당연하다. 5년 뒤 연대생 5명이 동양공업전문대 학생 설인종씨를 “프락치”라며 끌고 가 끈으로 손발을 묶고 각목으로 때렸다. 고려대생 3명도 가담했다. 술 냄새와 응원가 소음이 신촌을 가득 채운 연고전 마지막 날이었다. 축제의 밤, 설씨는 연세대 적십자 동아리 방에 갇혀 맞아 죽었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일류대 학생인 척한 게 전부였다. 각목으로 때리다가 쓰러지면 발로 밟았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 깨우고 다시 때렸다. 설씨가 과다 출혈로 죽자 가해자들은 젖은 옷을 벗겨 증거를 감췄다. 그러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몰려가 보호를 요구했다. 그들은 설씨가 프락치라는 증거라며 자백 내용까지 공개했지만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연세대 민간인 고문 치사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89년 10월 20일자 사회면. 연대생 5명과 고대생 3명이 학교를 속이고 연세대 동아리 활동을 한 동양공전 학생을 프락치로 몰아 납치한 뒤 학생회관에 끌고가 때려죽였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같은 유형의 폭행 사건이 수십건 발생했다.

전남대에서 송원전문대 졸업생 이종권씨가, 한양대에서 선반 기능공 이석씨가 한총련 대학생들에게 프락치로 몰려 맞아 죽은 때는 8년 후인 1997년이다. 전남대 사건 가해자인 정의찬씨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탁으로 경기도 월드컵재단 사무총장에 올랐다. 대선 직전 여론에 밀려 사퇴할 때까지 정씨도 유시민씨가 누린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김순호 경찰국장에 대한 공격은 유시민식 프락치 사냥이 밀실에서 벗어나 공공의 정치 영역에서 부활했음을 알려준다. 집단 린치가 재개된 것이다. 경찰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새 정부 경찰 정책의 상징인 경찰국을 흔들어 정권에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넓게 보면 한국 현대사를 뒤집으려는 일련의 시도와도 연결돼 있다. 정권 입장에서 국장급 간부 교체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양보해선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제동을 걸지 않으면 그들의 프락치 사냥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