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방어를 위해 달러를 쏟아부으면서 외환 보유액이 한달 사이 197억 달러 줄었다. 13년여만에 최대 감소폭이다. 사진은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 쌓인 달러화./뉴시스

미국발 금융 충격 앞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정부의 낙관론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환율이 널뛰고 주가가 폭락해도 다른 나라들이 다 겪는 일이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지난주 경제 부총리는 “경제 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는 게 외부 시각”이라고 했다. ‘매우’를 두 번 반복하며 자신감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말에 도리어 불안감을 느꼈다는 시장 관계자가 많았다. 만에 하나 덮쳐올지도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실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위기 대응 컨트롤 타워인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실엔 지금 금융위·금감원 파견 직원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금융 전문가 없이 전쟁을 치르겠다는 얘기다. 기재부 국제금융국장 자리도 한동안 공석이었다. 일시적 인사 공백이겠지만 그만큼 대응 태세가 한가하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24시간 전시체제를 가동해도 모자랄 판에 방어선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대비는 부족한데 말로 허세 부릴 때가 가장 위험하다.

미국의 과격한 금리 인상을 신호탄으로 전 세계가 환율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의 규칙은 단순하다. 약한 순서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환투기 세력은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한 나라의 통화·금융 시스템을 초토화한다. 정부의 대응 능력에서 약점을 노출하는 나라가 이들의 먹잇감이다.

우리가 ‘제2의 IMF’를 맞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국 경제가 1997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업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랏빚을 못 갚아 IMF에 손 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가능성이 작다고 완전 제로(0)인 것은 아니다. 단 0.1% 위험에도 대비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다. 게다가 준(準)환란급 위기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상황은 1992년 영국이 겪은 ‘검은 수요일’과 유사하다. 준(準)기축통화국임을 자부하던 영국이 조지 소로스라는 헤지펀드 수괴에게 무릎 꿇은 그 굴욕의 사건 말이다.

당시 유럽은 독일발 고금리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금리를 수직 인상한 것이다. 돈이 독일로 쏠리고 마르크화 가치가 급등하자 주변국들은 곤경에 빠졌다. 자국 통화를 방어하려면 독일을 따라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그에 따른 경제 침체가 우려됐다.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가 고금리를 감당할 만큼 경제 체력이 튼튼하지 못했다. 미국이 촉발한 2022년 환율 전쟁과 똑같은 구조였다.

경제가 부실한 나라부터 나가떨어졌다. 이탈리아·스페인 통화가 폭락하고 핀란드는 유럽환율메커니즘(ERM)을 탈퇴해야 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영국도 위태로웠지만 당시 메이저 정권은 자신만만했다. 외환 보유액이 충분하니 환율 방어에 문제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소로스는 영국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9월 셋째주 수요일,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투매하며 전면 공격에 나섰다. 이를 본 다른 헤지펀드들도 가담해 무려 1100억달러어치 파운드화를 팔아 치웠다. 영국 중앙은행이 보유 외환을 풀어 총력 방어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파운드는 하한선까지 폭락했고 영국은 하루 만에 백기를 들었다.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ERM을 탈퇴한 것이었다. 하루 동안 영국이 날린 손실액만 33억파운드에 달했다. 처참한 패배였다.

지금 우리도 ‘검은 수요일’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치솟는 환율을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고금리는 실물경제를 침체시키고 일자리와 소득을 줄인다. 빚을 끌어 쓴 ‘영끌족(族)’과 자영업자들을 벼랑으로 몰 수도 있다. 경기 우려 때문에 금리를 올리기 힘들다는 딜레마를 노출하는 순간 피 냄새를 맡은 환투기 세력이 달려들 것이다.

우려스럽게도 국제 금융가에서 한국은 ‘약한 고리’의 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환란 후 처음으로 6개월 연속 적자다. 수출은 부진하고, 경상수지마저 적자 기미다. 월가 전문가들은 한국 원화를 태국 밧과 함께 위기에 취약한 통화로 꼽는다고 외신이 전했다. 그런데도 정부 당국자들은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 있다. 자만하다 ‘검은 수요일’을 얻어 맞은 영국 꼴이 될까 두렵다.

금융 위기를 무사히 넘긴다 해도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다음엔 실물 경제 침체가 기다리고 있다. 1800조원의 가계 부채 시한폭탄에 불이 댕겨지면 어떤 대란이 벌어질지 모른다. 설상가상 에너지 위기도 코앞까지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에 휘몰아친 가스 대란이 우리까지 닥쳐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럽은 ‘에어컨 끄기’ ‘샤워는 5분 내’ 같은 비상 대처로 여름을 났는데 우리는 이렇게 천하태평이어도 되는가. 위기가 왔는데 위기가 아니라고 하는 그 한가함이 더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