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SK 전 회장이 1970년대부터 활엽수 위주로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을 일군 충북 인등산의 조림 전 모습(위)과 조림 후 모습. 최 회장은 2010년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됐다.

고(故) 최종현 전 SK 회장은 광릉 국립수목원 내 ‘숲의 명예전당’에 헌정된 여섯 조림 영웅 가운데 한 분이다. 다른 다섯 분(박정희 대통령, 김이만 나무 할아버지, 육종학자 현신규, 축령산 조림왕 임종국, 천리포수목원 민병갈) 공적은 잘 알려져 있고 그중 두 분은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한 일도 있다. 최 회장은 2010년 산림청이 여섯 번째로 헌정했는데, 그 뉴스를 놓치고 있다가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됐다. 어떤 공적이 있었는지는 따로 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3년 전 강원도 홍천군 내촌목공소 김민식 고문이 낸 ‘나무의 시간’이란 책에서 최 회장의 나무 심기에 대해 알게 됐다.

설악산 가는 길에 내촌목공소에 들르곤 했다. 전국 목수의 선망의 대상인 이정섭의 목공소다(그는 2년 전 돌연 목수 일을 던지고 서울서 철학서점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카타르시스를 줬다. 그러던 중 김민식 고문을 알게 됐고 그가 쓴 책도 읽게 됐다. 그 속에 최종현 회장과 인등산(충북 충주) 스토리가 실려 있었다. 김 고문은 독일 목재회사의 파트너로 수십년 세계를 누볐던 국제적 안목의 목재 딜러다. 그의 책 속 인문학적 축적은 탄복할 따름이다. 김 고문은 2006년 이정섭 목수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발표회도 하고 전시장도 열면서 이정섭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김 고문은 책에서 인등산을 극찬했다. “우리 땅에 재목으로 쓸 나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적이 없는데 인등산에 나무가 있었다”고 했다. 미국 애팔래치아에 손색 없더라고도 했다. ‘50년 전 나무 극빈 국가이던 한국 땅에서 40년, 50년 전 심은 가래나무·참나무·자작나무 숲을 보다니 벅찬 사건’이라고 썼다. ‘가구회사, 펄프회사가 아니라 일반 기업이 50년 전부터 본업과 관계없이 숲을 가꿔왔다는 것은 놀랄 만한 스토리’라고 했다.

그 숲이 궁금해 지난 봄 어느 주말 지방 가는 길에 인등산을 들렀다. 1155만㎡(350만평) 산이다. 감동 수준이었다고 하긴 어렵다. 인등산 자작나무는 십여 년 전 알래스카에서 마주했던 자작나무 군락에 견준다면 아직 초라한 수준(직경 20~30㎝)이었다. 가래나무는 직경 40㎝대가 많았다. 인등산 조림 역사는 이제 50년. 수백년 숲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헐벗었던 50년 전 인등산과 오늘의 숲을 비교하면 천지개벽이 틀림없다.

김 고문은 책에서 ‘오지 악산에 속성수가 아니라 활엽수를 심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한국은 기적의 조림 국가다. 국토 산림 비율은 63%나 된다. 하지만 목재 자급률은 18%에 그친다. 쓸 만한 수종(樹種)을 골라 심지 않았다. 손요환 고려대 교수는 “식민 수탈과 전쟁 파괴를 거치면서 토심이 얕아져 리기다·아카시·싸리나무 등 양분 요구도가 낮은 속성수 위주로 심어 왔다”고 했다. 목재로 쓸 나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급 목재는 주로 활엽수에서 공급된다.

금년 봄 동해안에서 큰 산불이 연이어 났다. 송진, 솔방울의 소나무 위주여서 산불에 취약하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울진에서 진화를 지휘하던 최병암 당시 산림청장에게 물어봤다. 최 전 청장은 “우리 산은 척박해 활엽수가 잘 자라기 힘들다”고 했다. 활엽수는 영양 부족이면 몸통이 안으로 말려든다는 것이다. 송이 수확을 원하는 지역 요청도 있어 소나무 등 위주로 심어왔다고 했다. 침엽수는 척박한 땅에 잘 견디고 겨울에도 광합성을 해 잘 자라긴 한다. 반면 활엽수 뿌리는 땅 밑 깊게 자리잡는다. 태풍과 큰 눈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다. 목질도 단단해 비싼 목재가 될 수 있다. 김민식 고문은 소나무를 박하게 평가했다. 습기에 약하다는 것이다. 김세빈 충남대 명예교수는 “우리 나무는 칩으로 잘라 펄프와 판재 용도로 주로 쓴다”고 했다. 값나가는 원목·제재목은 뉴질랜드·미국 등에서 들여온다.

최종현 회장은 1972년 식목을 전담하는 서해개발(현 SK임업)이란 회사를 세웠다. 이때부터 인등산을 비롯해 천안 광덕산, 영동 시항산, 강원도 고성·횡성 등의 황폐지를 사들여 나무를 심어왔다. 도합 4500㏊(1360만평) 규모로 여의도 16배 면적이다.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 부동산 가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헐벗은 오지들을 골랐다. 개발될 곳에 나무를 심으면 나중 결국 베어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무 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조림은 자기가 씨를 뿌려놓고 스스로가 수확할 수는 없는 투자다. 그는 1998년 68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그와 30년 우정을 쌓았던 원로 언론인 홍사중씨는 최 회장이 “돈을 벌기 위해 사업하는 장사꾼은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록했다. 최 회장의 기업 경영은 홍보 목적의 요즘 기업들 가짜 ESG와는 차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