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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양이라 부르는 조선 왕국 수도 공식 명칭은 한성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과 함께 고려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한성판윤이다. 황희(태종), 맹사성(세종), 서거정(예종), 이덕형(선조)과 채제공, 박문수(영조)에서 민영환(고종)까지 숱한 명망가들이 한성판윤 자리를 거쳐갔다. 그런데 그 쟁쟁한 인물들이 거쳐간 한성판윤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조선 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p25)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p23)
한성판윤은 품계가 정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 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본질적 질문을 해본다. 숫자에 답이 있다.
“조선 시대 서울시장은 몇 명이었고, 임기는 몇 년이었나?”
답은 이렇다.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서울역사편찬원,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 서울역사편찬원, 2017: 류시원, 앞 책) 행정 실적 기록이 있었다면 오히려 기이한 숫자가 아닌가.
후기는 어떤가. 1864년부터 1907년까지 고종 시대 43년만 따지면 1864년 음력 4월 16일 임명된 이우(李㘾)부터 1907년 양력 3월 11일 임명된 마지막 한성부윤 박의병까지 모두 429명이었다.(장경호, ‘고종대 한성판윤의 특징과 변화(1863~1907)’, 서울학연구 65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그 고종 시대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한 달 6일이었다.
그러니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꽉 조여 있었어야 할 나사들이 다 달아나고 없는 조선 시대 서울시장 이야기.
대한민국 서울시장, 2073대 판윤
위에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512년 동안 모두 2012명에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불완전하다. 1차 사료가 부족하다. 공무원 임면 관계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와 각종 사료들이 1592년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불타버렸거나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선조 때까지 공무원 임면 기록은 실록을 일일이 들춰봐야 한다.
해방 후 역대 한성판윤에 대한 통계는 1957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한성판윤선생안’이 처음이다. 그리고 2017년 그 후신인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참고해 새로운 통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1905년 양력 1월 임명된 박의병이 제2010대 한성판윤이다. 박의병은 다른 직을 맡았다가 그해 말 다시 한성판윤에 임명됐고 이듬해 경성부윤에 임명됐다. 연구자에 따라 총 판윤 숫자는 차이가 나지만 현재 2010명 안팎으로 정리돼 있다. 식민시대 경성부윤을 합쳐서 현 대한민국 서울시장 오세훈은 1395년 1대 한성판윤 이래 2073대째 서울시장이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처럼 장관급이다. 이 글은 ‘서울역사편찬원’이 편찬한 ‘조선시대 한성판윤 연구’의 명단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성판윤이 하는 일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이 해야 할 일은 대개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등에 관한 사무였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시장 업무와 다를 바 없는 종합적인 행정가였다. 그런데 여기에 민간 빚 문제(負債·부채)와 폭력(鬪毆·투구), 살인사건 검시권까지 가진 강력한 사법권자이기도 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한성부)
바로 판윤이 이 모든 사무의 최종 결정권자다. 여기에다 한성판윤은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대중국 외교에도 관여하는 막강한 벼슬이었다.
그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윤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 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박경룡, 앞 책, p45)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坐起·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1538년 8월 18일 ‘중종실록’)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市政)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 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기네스북에 기록될 재임 기간
헌종 때인 1848년 음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1848년 음11월 30일 ‘승정원일기’) 1799년 음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1799년 음9월 27, 28일 ‘승정원일기’)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한성판윤은 매일 궁궐에 들어가 국왕 및 판서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래서 ‘말단 행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적었다. 그렇다 보니 앞에 언급했듯 중종 때 ‘판윤이 출근하지 않아서 하급 관리들 업무가 마비된다’는 보고가 올라간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 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九卿)’을 두루 거치는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박경룡, 앞 책, p45) 9경은 정2품인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久任官)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판윤 자리는 파리 목숨이기도 했다. 1762년 944대 판윤 홍상한이 “소나무 가지가 말라 죽으니 군에서 감시하게 해달라”고 상소하자 영조는 “아침회의 석상에서 나뭇가지 이야기를!” 하며 홍상한을 파면했다. 임명된 지 한 달이 안 된 판윤이었다.(1762년 음8월 19일 ‘영조실록’) 1790년 12월 1214대 판윤 구익은 창경궁 홍화문 앞 정조 행차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고 파면됐다. 재직 기간은 한 달 11일이었다.(1790년 음11월 4일, 음12월 15일 ‘정조실록’)
상상 초월, 지방 수령
한성 판윤만 봐도 조선왕국 행정은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 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 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은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아졌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 임기 만료 전 교체 이유가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그러니까 업무 보는 도중에 신임 부사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다. 또 신구 수령 사이에 한 달 이상 텅 빈 공백 기간이 있는 인사도 많았다. 인사행정이 법전을 무시한 채 무절제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원균, ‘조선시대의 수령직 교체 실태’, 역사와세계 3권, 효원사학회, 1979)
수령이 교체되면 지역민은 닷새에 걸쳐 신임 수령을 맞는 의전을 벌여야 했으니, 이 또한 위민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번 수령을 거치면 전답을 사고 집을 새로 짓는 자가 열 가운데 6, 7은 되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수령으로서 짐바리가 없는 자가 없다.’(1728년 음1월 11일 ‘영조실록’)
매관매직과 부실인사의 극, 고종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29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 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행정을 책임질 수 있었을까. 1886년 좌의정 김병시가 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은 갖추어져 있으나 꼭 시행되지는 않고 수령 교체가 빈번해 영접과 전송에 곤경을 치른다. 가난한 백성이 가렴주구에 시달린다.”(1886년 음8월 16일 ‘고종실록’) 대한제국시대 황실 고문을 지냈던 전 주대한제국 미국공사 윌리엄 샌즈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 임대업자는 뇌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12%나 받았다. 신임 지방관은 어떡하면 돈을 거둘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다. 관리들은 프랑스혁명 이전 세금 청부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W. 샌즈, ‘Undiplomatic memories’, Whittlesey house, McGraw-Hill book company,1930, p118) 법은 완비됐으되 지키지 않았고, 시장이 별처럼 많았으되 시장이 아니었던 조선조 한성 판윤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