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59회>

<2014년 쉬요우 (徐友漁, 1947- )교수. 사진/ google image>

진정한 철학자는 역사의 경험을 깊이 살펴서 현실의 인간을 실존적으로 탐구한다. 사이비 철학자는 역사를 외면하고 현실에 등 돌린 채로 경전 문구만 읊조리고 사자(死者)의 어록만 답습한다. 모든 철학적 사유는 구체적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하지만, 정치의 시녀가 된 강단의 철학자들은 경험적 탐구는 없이 관념의 유희에 빠져든다. 철학적 교조주의는 그렇게 역사와 경험을 무시한 채로 과거의 텍스트만 끼고 사는 지식인의 직무 유기와 지적 태만에서 생겨난다.

비판 정신을 상실한 공산정권의 관제 철학자들

1950~60년대 중국의 철학자들은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 이데올로기의 제작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 위에서 교조적 혁명 이론을 만들었다. 중국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관제 이데올로기를 제작했기에 그들은 철학의 정신을 버리고 권력에 기생하는 선전부대의 요원으로 연명했다.

특정 이론을 절대 진리라 믿는 순간 인간의 비판적 사유는 마비되어 종교적 독단에 빠져든다. 과학 철학자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과학과 비(非)과학의 차이를 논하면서 “반증 가능성 원칙(falsification principle)”을 제시했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의 오류는 검은 백조가 출현하는 순간 경험적으로 반증된다. 반면 “신은 전지전능하며 편재(遍在)한다”는 믿음은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종교적 교리일 뿐이다.

20세기 공산국가의 관제 철학자들은 중세 신학의 대전제 대신에 “마르크시즘의 유물변증법이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입만 열면 과학적 사회주의를 외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신성시했기에 그들은 비과학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공산권 전체주의 국가는 고분고분한 철학자들을 시켜서 교조적 혁명 이론을 만들게 한 후 그들이 제작한 폐쇄적인 이념으로 전 인민을 세뇌하는 선전·선동을 이어갔다.

지난 70여 년 중국공산당은 사상의 획일화를 위해 이데올로기 공작을 펼쳐왔지만, 그 어떤 정권도 인간의 비판 정신을 말살할 수는 없다. 시베리아 집단수용소에서 8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솔제니친(1918-2008)은 스탈린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여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오하고도 영롱한 그의 문장이 웅변한다. 반성적 존재로서의 호모사피엔스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지성과 판단력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1953년 카자흐스탄 수용소 포로 시절의 솔제니친의 모습. 사진/Aleksandr Solzhenitsyn Center>

철학자 쉬요우위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소식 접하고 너무나 기뻤다”

중국 문화대혁명을 직접 겪었던 홍위병 세대에도 당시 계급혁명의 광기 속에서 스스로 범했던 갖은 오류와 모순을 돌아보며 이후 평생에 걸쳐 참회와 각성의 기록을 남긴 깨어 있는 지성들이 적잖다. 현재 뉴욕 뉴스쿨(New School)에서 장기 방문학자로 재직 중인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가 대표적인 한 명이다. 쉬 교수는 마오쩌둥의 사망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너무나 기뻤다. 이제 우리 세대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 통치 아래서 우리는 실제로 온전히 10년을 허비해야만 했다. 1976년 그때 마오쩌둥이 죽지 않았다면, 이 모든 변화는 없었으리라. 바로 그 점이 중국 정치의 슬픔이다. 단 한 명의 존재가 억만 명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느냐, 비참하게 살아야 하느냐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 분기선이 단 한 명의 생사로 결정이 됐다는 점이다.”

마오쩌둥 사후에야 그는 서른 넘은 나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40여 년의 세월 그는 비판적 철학자의 일로를 걸었다. 그의 철학은 중국 현대사의 부조리와 중국 사회의 불합리를 타파하는 강력한 이념적 무기이다. 그는 그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청년기 그가 직접 경험했던 문화혁명의 광기를 역사적으로 파헤쳤다. 날카로운 그의 붓끝에서 ‘마오쩌둥’이라는 허구의 인격신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다.

<마오쩌둥 사망 후 사진을 잡고 울부짖는 청년들. 사진/공공부문>

대학살 전 학생들 “인민해방군이 설마 인민을 죽이겠어요?”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서구의 정치철학과 사회이론의 전문가인 쉬 교수는 중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이며 비판적 사상가이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쉬 교수는 광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 탱크 부대가 도심을 뚫고 들어와 대학살을 벌이기 직전까지 쉬 교수는 학생들에게 숙소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천진난만한 학생들은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설마 죽이겠어요?” 하며 완강히 버티었고, 바로 다음 날 탱크 부대가 대학살을 자행했다.

쉬 교수는 이후에도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2008년 12월 중국 국내외 반체제 지식인과 민주 활동가들은 유엔 보편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에 맞서 근본적인 헌정 개혁을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했는데, 쉬 교수는 최초 서명자 30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2014년 1989년 6.4 운동 관련 세미나를 주최한 후 잠시 구속되었던 쉬 교수는 이듬해 뉴욕 뉴스쿨에 초빙되어 도미했다. 그해 쉬 교수에게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Olof Palme) 인권상이 수여되었다. 오늘날까지 쉬 교수는 뉴욕에 머물면서 중국의 자유화를 위한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 집단의 내전에 관해 강의하는 쉬요우위 교수. 오른쪽은 홍위병 운동을 탐구한 그의 역사서. 사진/공공부분>

쉬 교수는 관념의 아성에 머물기를 거부한 진정한 철학자다. 수준 높은 철학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도 그는 문화대혁명(1966-1976)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을 출판했다. 1999년 출판된 책의 제목은 <<형형색색의 조반(造反): 홍위병 정신 밑바탕의 형성과 변천>>이다. 이 책을 펼치면 문화혁명 10년 극단의 역사를 직접 연출했던 수억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책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문혁은 10억 가까운 사람들이 휘말려 들었던 군중 운동이었다. 광대한 군중의 참여야말로 문혁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당시 그들은 왜 그토록 기괴하게 거동하고 열광적인 심리를 보여야만 했는가? 이는 초특급 마술사의 최면술에 걸려든 결과인가? 아니면 사회, 역사, 문화 등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는가? 그들을 광기 상태에 빠뜨려서 ‘너 죽고 나 살자’며 싸우게 했던 그 마력은 과연 이데올로기였던가, 아니면 개인이 당면한 이익이었던가?”

제1장 서두에는 다음 문장이 나온다.

“교회를 깨부수고 서적을 불태우고 스승들을 구타했던 노(老) 홍위병이나 긴 창이나 기관총을 손에 직접 들고 살상을 저질러 눈이 붉게 충혈됐던 조반파(造反派) 홍위병이나 문혁 시기 홍위병은 모두가 파괴적 행동으로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일탈을 부추기고 야만적이고 황당한 행동거지를 그토록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는가? 민족의 심리적 특징인가? 전통문화의 영향인가? 아니라면 청춘기 특유의 격동과 일탈 심리였나? 초인적 영수의 최면술과 같은 혹세의 마력이었나?

쉬 교수의 궁극적 관심은 홍위병의 파괴적 행동과 광적인 심리 상태를 규명하는 데 있다. 쉬 교수가 홍위병의 심리를 파헤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경험적으로 탐구하기 위함이다. 실험실에서 청개구리를 해부하는 방식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알아낼 수가 없다. 맹자(孟子)처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강조한들 성선(性善)의 대전제를 증명할 길은 없다.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논하려면 우선 현실의 인간을 깊이 살펴보아야만 한다. 구체적인 역사의 상황에 던져진 실존적 개체의 행동과 생각을 관찰하고 분석해야만 인간 본성을 직시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쉬 교수의 홍위병 연구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인간관을 해체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경험적 탐구라 할 수 있다.

문혁의 광기...출신 성분이 나빴던 젊은 쉬요우위의 번민

최근 쉬요우위 교수는 유튜브 “왕단(王丹) 학당”의 ‘구술 역사 공정’에서 문화혁명이 발생했던 청년기 그가 겪어야 했던 고뇌와 번민에 관해 회고했다.

1947년 3월 17일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태어난 그는 서른 살 되던 1979년에야 쓰촨 사범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교 3년이었던 1966년 문화혁명의 돌풍이 일어났기에 10년간 그의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 자체가 중단되었고, 도시의 청년들은 멀리 산간벽지에 하방(下放)되어 자기 계발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중세의 농노와 같은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그는 스스로 행복한 나라에서 열심히 잘 산다고 굳게 믿었다. 남달리 총명하고 성실했기에 그는 학업에 전념해서 교사들의 총애를 얻었고, 덕분에 학급 반장이 될 수 있었다.

행복한 유년의 기억은 그러나 1963년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잠시 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마오쩌둥은 바로 그해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 1898-1969)를 앞세워 이른바 사회주의 교육 운동(1963-1966)을 벌였다. 530여만 명의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그중 거의 8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던 이 가혹한 정치운동은 일시에 중국 사회에 “계급투쟁”의 광풍을 몰고 왔다. 문혁의 전초전이었다.

전 중국 사회에서 이른바 “계급 노선”이 강조되면서 중·고교도 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학생들 개개인의 성적은 학습 능력과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집안 배경과 출신성분으로 결정되는 부조리한 상황이 이어졌다.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학생은 절대로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특히 정치 과목이 그러했다. 밤을 새우고 공부해서 모범 답안을 적어내도 그는 절대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었다. 그의 출신성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혁 발발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1966년 8월부터 중국 전역에선 집안 배경에 따라 개개인의 혁명성이 결정된다는 이른바 “혈통론(血統論)”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공산당 고관대작의 자제들은 “붉은 귀족”이 되어 과거 조부모나 부모가 지주나 반혁명 분자로 분류됐던 계급 천민의 자제들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인종차별만큼 가혹한 출신성분 차별이었다.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이고 (老子英雄, 兒好漢),

부모가 반동이면, 아이는 먹통이다 (老子反動, 兒混蛋).”

<문혁 초기 혈통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부모가 영웅이면 아이는 호걸.” 이미지/공공부문>

사회주의 신분제를 고착화하는 황당무계한 구호 아래서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은 배제되고 소외되었다. 마오쩌둥 배지를 달 수도 없었다. 음지로 밀려난 그는 날마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으며 반혁명적 사유를 버리려 노력했지만, 집안 배경 때문에 2등 공민이 돼야 하는 불합리를 그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그는 그렇게 차별받고 배제되었기에 1966년 홍팔월(紅八月)의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고 회고한다. 당시 홍위병들은 계급 천민의 마을로 쳐들어가서 민가를 초토화하는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그해 8, 9월 베이징에서만 1772명이 홍위병의 손에 학살당하고, 3만3695개 민가가 파괴되고, 8만5천명 넘게 추방되었다.

“만약 내가 출신성분이 나쁘지 않아서 초기부터 홍위병이 되었더라면, 다른 홍위병들과 달리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당시 나 자신의 도덕 관념상 그럴 수는 없었을 듯하다. 대세에 휘말려서 나쁜 짓을 했을 수가 있었으리라. 낄 수가 없어서 나쁜 일을 하지 않았으니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문혁이 절정에 치달으면서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도 홍위병 조직을 결성해서 적극적으로 혁명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출신성분이 나쁜 학생들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들의 이념적 선명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강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홍위병 운동에 참여하면서 쉬요우는 밤낮으로 계급투쟁을 고취하는 선동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계속>

<문혁 시절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추었던 충자무(忠字舞). 조반무(造反舞)라고도 불렸다. 사진/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