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OoeehbJDIs8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년 대사성 민영익
고종 왕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은 성균관 학생이던 1877년 음력 3월 5일 춘계 시험인 삼일제(三日製)를 무사히 치렀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이 시험에서 고모부인 고종은 민영익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이 사실을 그 조상인 민유중과 할아버지인 민치록과 아버지 민승호 사당에 제사해 알리라고 명했다.(1877년 음3월 5일 ‘고종실록’) ‘직부전시’는 중간 시험을 다 생략하고 곧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로 통과시키는 명이다. 그리고 1년 5개월이 지난 1878년 음력 8월 11일 민영익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때 나이는 만 18세. 소년등과에 이어 소년 대사성이 탄생한 것이다.
518년 동안 대사성 2101명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명이 아니다. 이천백한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조선왕국에서 성균관은 국가가 설립한 최고 성리학 교육 및 인력 충원 기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오는 것인가. 성리학을 위해 명예와 책임을 과연 다할 수 있었는지 한번 알아보자. 이 글에 나오는 숫자들은 ‘성균관대학교 육백년사-人’(성균관대학교, 1998)의 ‘역대 대사성 및 성균관장 명단’을 근거로 분석했다.
1395년 조선, 성균관을 만들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성 천도 이듬해인 1395년 성리학 교육기관인 성균관 공사를 시작했다. 3년 뒤 완공된 성균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明人倫 成人才·명인륜 성인재).’(정도전, ‘조선경국전’ 上 예전)
성균관에는 공자를 위시한 역대 중국 성인을 모신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이 설치됐다. 현재 명륜당에 걸려 있는 ‘明倫堂’ 현판은 1606년 선조 때 파견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실내에 걸린 또 다른 ‘明倫堂’ 현판은 성리학 창시자 주희(朱熹)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 A부터 Z까지 명륜당 교육 과목은 일관되게 성리학이었다.
한성 천도 전인 1392년 첫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사람은 유경(劉敬)이다. 1392년 음8월 20일에 임명돼 1395년까지 3년 동안 성균관 기틀을 닦았다. 유경은 고려 성균관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좨주(祭酒)로 일했다. 조선 성균관은 고려 학제를 이어받은 학교였다.
학문의 최고 수장, 대사성
성균관은 성리학을 교육받은 학생들이 과거를 통해 공무원으로 진출하도록 하는 인력 양성 기관이었다. 그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은 법적으로 ‘유학(儒學)의 교육에 관한 일을 관장하도록’ 규정됐다. 법정 임기는 없었다.(‘경국대전’ 이전(吏典) ‘성균관’) 대사성을 임명하는 기준은 대체로 ‘경학에 정통하고’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학문과 인격과 연령이 고려됐다.(정낙찬,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의 자격 및 자질, 임명, 임기, 대우’, 인문연구 제17권 제1호,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5) 천거를 받고도 학문이 부족하고 덕망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한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일단 임명되면 대사성은 장기간 성균관을 책임졌다.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세종은 1418년 9월부터 1450년 3월까지 재임했는데, 윤달을 포함해 이 390개월 동안 대사성에 뽑힌 사람은 14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27.9개월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사육신이 속한 집현전을 폐지시켰던 세조 때 대사성 임기는 8.2개월로 급감했다. 하지만 그 손자 성종 때는 12.9개월로 회복됐다.
폭군 연산군 때도 143개월 동안 대사성은 8명으로 평균 17.9개월을 근무했다. 물론 성균관이 활쏘기 경연장과 기생파티장이 되었고(1504년 8월 17일 ‘연산군일기’), 대사성은 이를 떨면서 구경해야 했지만.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고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명예의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 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이었다.
도살장 혹은 공무원입시학원, 성균관
‘하인들이 동서재(東西齋) 근처에서 항시 소를 도살하고 있었는데 이달 12일에 말가죽과 소뼈 등을 찾아내게 되었다고 했다. 학궁(學宮·성균관)이 도살장이 됐으니 지극히 해괴하고 놀라운 일이다.’(1542년 1월 19일 ‘중종실록’)
때는 폭군을 끌어내리고 왕족 이역(李懌)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한 사림(士林) 시대, 중종 때였다. 중종은 반정 당일에도 자기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왕비 신씨의 폐위와 복위의 본말’) 왕위에 오른 뒤 실질적인 권력은 사림 반정 세력에게 있었다. 연산군 때 ‘도의(道義)’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1470년 11월 8일 ‘성종실록’) 그 무늬만 학교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개국 초 조선왕조 야심작 성균관은 그렇게 조락했고,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육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1543년 사립학교 ‘서원(書院)’ 탄생
도살장 보고 이듬해인 1543년 어느 날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남송 때 주희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뜬 최초의 서원이다. 선비 교육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지역 사림으로 바뀌었다. 서원에서 유교 교육과 선현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주요 서원이 설립되면 왕이 이름을 내리는 ‘사액(賜額)’을 통해 권위를 씌워줬다. 부진 일로를 걷고 있던 관학을 복구하느니 서원을 독려하는 편이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다.(최완기, ‘조선 서원 일고’, 역사교육 18, 역사교육연구회, 1975) 성균관 대사성이 수행하던 ‘명예와 책임’을 서원에서 집단으로 수행하게 된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은 그저 명예직 혹은 국왕 하사품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발에 채는 숫자, 대사성
중종 때 7.5개월이던 대사성 임기는 선조 때 5.1개월로 줄었다. 사림 가운데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 때도 5.1개월이었다. 효종 때 서인 세력은 아예 대사성보다 권위에서 앞서는 ‘좨주(祭酒)’라는 직제를 만들어 서인만을 천거해 임용했다. 첫 번째 좨주는 서인 태두 송준길, 두 번째 좨주는 또 다른 태두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두 송(宋)씨와 그 후손은 모두 8명이었다.(정구선, ‘조선후기 천거제와 산림의 정계 진출’, 국사관논총43, 국사편찬위원회, 1993)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 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제대로 된 교육을 표방한 서원이 그만큼 폐해가 많았다.
대사성 권위 또한 자유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평균 임기는 2.7개월이었다. 탕평책을 통해 각 당을 견제하던 영조 때는 637개월 동안 272명, 평균 임기 2.3개월이었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만 갈래 강을 비추는 밝은 달의 늙은 주인)’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1787년 11월 4일 ‘정조실록’) 성균관 교육은 당연히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대사성 직임은 매우 중요하다”고 왕에게 보고하면서도 왜 이렇게 비정상적인 인사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매우 드문드문 몇 곳만 제외하고는’ 뚜렷한 기록도 없다.(장재천, ‘정조 때의 성균관 대사성 교체 논고’, 한국사상과 문화 82권0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16년)
성균관보다 역사가 긴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808년 동안 총장 145명이 5.6년씩 재임했다.(‘British History Online’) 799년 역사 옥스퍼드대 총장은 187명으로 임기는 평균 4.3년이었다.(‘British History Online’) 1637년에 설립된 미국 하버드대는 386년 동안 총장이 30명이었고 평균 임기는 13년이었다.(하버드대 홈페이지, ‘History of the Presidency’) 1644년 순치제부터 1799년 건륭제까지 155년 동안 조선 성균관 대사성과 같은 청나라 국자감 한족 좨주는 64명이었다. 평균 임기는 2.4년이었다. 청나라 국자감은 만주족과 한족 좨주가 동시에 임명됐다.(중국위키피디아, ‘청조국자감좨주(淸朝國子監祭酒)’)
고종 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종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27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털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정덕희, ‘조선시대 성균관 대사성의 출신배경 실태’, 조선시대사학보 45권0호, 조선시대사학회, 2008)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성리학 국가요 선비의 나라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 대사성 이야기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