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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흐름을 바꾼 탐관오리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趙秉甲)은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더럽고 탐욕스러운 관리였다. 얼마나 탐욕스럽고 더러웠나. 탐관오리들로 인해 조선팔도에 민란이 들끓던 그때, 고종도 “조병갑이 형편없이 수령 노릇을 했다’(1894년 음4월 24일(이하 음력) ‘고종실록’)고 힐난하고 그가 저지른 일을 조사한 현지 조사관이 “이전에 듣지 못한 일[事未前聞·사미전문]”(1894년 7월 17일 ‘고종실록’)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더러웠다.
그런데 조병갑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 흐름을 역류시킨 사람이다. 조선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따진다면 이 조병갑을 능가할 개인이 없다. 그저 개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만석보를 만들고 아비 공덕비 비각을 세웠다. 물세를 뜯고 비각 건축비를 착취했다. 착취당한 백성이 죽창을 들었다. 그 죽창을 꺾기 위해 정부에서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외국군끼리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전쟁 결과 조선이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돌아간 역사를 조병갑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조병갑이 충남 공주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옆 능선에는 그 아버지 조규순 부부 무덤도 있다. 동진강에는 만석보 흔적이 남아 있다. 옛 고부 땅에는 조규순 선정비가 여태 서 있다. 그리고 역사 흐름을 바꾼 장본인, 조병갑이 저기 잠들어 있다.
동학의 시작, 1893년 최제우 신원
1800년 조선 22대 국왕 정조가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하고 죽었다. 김조순 사위이자 23대 국왕 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왕실 외척이 국정을 농단한 소년왕(少年王) 시대를 세도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국정은 농단당하고, 그 와중에 400년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물 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얌전하던 조선 백성이 죽창을 들기 시작한 민란 시대이기도 했다.
1893년 3월 충북 보은에 동학교도 수만명이 집합했다. 1864년 처형당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복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탄압으로 맞섰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급파해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민원을 접수했다. 그해 11월 어윤중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는 이러했다.
‘조병식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이후 몹시 가혹하고 끝없이 가렴주구하여 진실로 근래에는 들어보지도 못하였다.’(1893년 11월 7일 ‘승정원일기’, ‘조병식 탐학 장계’) ‘공주 백성 오덕근’을 비롯해 땅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간음했다’고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한겨울에 집과 땅을 차지했다. 아산 백성 김상준은 관아로 끌고와 죄를 자백하라며 주리를 틀었다. 자백할 죄도, 돈도 없던 김상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조병식에게 돈을 뜯긴 사람들 명단과 액수가 워낙 많아서 보고서에는 부록이 따로 붙어 있었다.
이 조병식은 이듬해 7월 15일 충남 면천에 구금된 뒤 19일 의정부 요청에 의해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30일 고종은 조병식 석방을 명했다. 9월 23일 고종은 조병식을 사면하고 관직에 복귀시키라고 명했다.(이상 해당 날짜 ‘고종실록’)
그 와중에 전라도 고부에서 또다시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병식 4촌(8촌이라고도 한다) 동생, 고부군수 조병갑이 문제였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고종정권 ‘빽’
1889년 1월 7일 김해부사였던 조병갑이 영동현감으로 발령났다. 조병갑은 “부임하는 길에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면서 인사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종은 4월 7일 조병갑을 고부현감으로 발령낸다. 이조에서 (전임 김해부사인) 영동현감 조병갑, (전임 보은군수인) 현 고부현감 송병두가 현 보직에서 인수인계가 안 끝났다고 고종한테 보고하니까 “구애받지 말라”고 했다.
김해도 평야고 고부도 평야다. 화폐경제 따위 존재하지 않고 쌀이 최고였던 그 조선왕국 쌀 금고다. 부사에서 현감으로 가기 싫고 아무것도 없는 첩첩산중 충청도 영동으로 가기 싫으니까 꾀병으로 시간을 벌면서 알짜 지역인 쌀창고 고부로 갔다. 이게 조병갑이 고부와 맺은 첫 번째 악연이다. 이후 조병갑은 마치 양떼목장에 들어온 늑대처럼 악행을 즐겼다.
그리고 1892년 4월 2일 조병갑은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발령이 났다. 무슨 일인지, 조병갑은 26일 만인 4월 28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발령이 났다. 그 며칠 지옥을 탈출했다고 기뻐했던 고부 주민들이 그 얼굴을 다시 봤을 때, 그 속은 얼마나 처참했을까.
악행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 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조병갑은 익산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해 12월 24일 신임 고부군수 이은용이 황해도 안악군수로 발령이 나더니 1894년 1월 2일까지 신좌묵, 이규백, 하긍일, 박희성, 강인철 순으로 계속 신임 고부군수가 바뀌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서류상으로 고부군수가 일곱 명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조吏曹에서는 “조병갑이 세금 징수에 문제가 많았지만 새로 군수를 뽑으면 일을 더 못하리라 본다”며 익산으로 갈 조병갑을 고부에 눌러 앉혔다.(1893년 11월 30일~1894년 1월 9일 ‘승정원일기’)
그렇게 조병갑이 고부를 거덜낸 것이다. 그 모든 배경에는 속칭 ‘빽’이 있다. 1894년 2월 조병갑의 악행이 폭로된 뒤 전라관찰사 김문현이 조병갑을 체포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의정부 정승들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칭찬한다고 연임시키더니[始也褒仍·시야포잉] 지금은 잡아오겠다고?’(1894년 2월 15일 ‘고종실록’)
관찰사 ‘빽’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빽이 작용한 관찰사 보고서를 모른 척 긍정적으로 결재한 정승들 위선과 무책임도 보인다.
1892년 4월 조병갑이 중앙정부 기기국 위원으로 전임됐을 때, 왕비 민씨가 조카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관직) 외에는 나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민비 편지, ‘고궁 1178′)
일단 다른 보직에 임명한 뒤 상황을 보겠다는 뜻이다. 조병갑은 기기국 위원 재임 26일 만인 4월 28일 고부군수로 발령이 났다. ‘고부군수 조병갑’ 뒤에 고종-민씨 척족 세력의 강력한 ‘빽’이 작용했다는 증거다.
역사적인 악행, 만석보와 공덕비
이러구러한 경로로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을 이끌었던 전봉준에 따르면, 조병갑이 군수로 있으면서 저지른 비리는 이러했다.
‘첫째, 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 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民洑) 아래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 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 부자들에게 불효, 음행 따위 죄목으로 걷어낸 돈이 2만 냥이 넘고 다섯째, 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천냥을 뜯고 여섯째, 나라 세금 낸다고 고급 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은 횡령한 죄.’(동학농민혁명 사료 아카이브, 1895년 2월 9일 ‘전봉준 공초’, ‘초초문목(初招問目)’) 전봉준은 이 모두를 “수령이 홀로 행했다”고 답했다.
여러 죄상 가운데 만석보가 가장 컸다. 고부에 흐르는 동진강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아 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에 조병갑이 민력을 강제 동원하고 남의 산 소나무를 강제로 징발해 또 둑을 쌓고 물세를 신설해 챙겼다는 것이다. 악행은 부임하자마자 ‘처음부터 행했고’, 그 모든 악행 이득을 ‘혼자서 다 챙겼다’는 것이다.
1894년 1월 10일 고부 농민이 죽창을 들었다. 조병갑은 도주했다. 동학군은 고부관아 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다. 그리고 1월 17일 농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했다.(국사편찬위, ‘동학농민혁명사 일지’)
되돌리지 못한 흐름
동진강은 다시 흘러갔다. 하지만 한번 역류를 시작한 역사는 되돌리지 못했다. 2월 15일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 탄압으로 일관했다. 농민 반란은 더욱 확대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황토현에서 동학군에 패한 관군사령관 홍계훈은 조정에 원병 요청을 건의했다. 고종은 최측근이자 농민군의 타도 대상인 민영휘와 함께 국내 주둔 중이던 청군사령관 원세개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공식 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조선 파병은 공동으로 한다’는 1885년 ‘천진조약’ 조항을 내밀고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동학전쟁은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작전에 궤멸됐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 종전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1조에 일본은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조항을 삽입했다. 대륙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역추적하면 조병갑이라는 더럽고 탐욕스러운 지방관리, 중앙권력 비호를 받는 탐관오리 개인 비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일개 관리 비리가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된 것이다.
조병갑의 평화로운 말로
실록에 따르면 조병갑은 1894년 5월 4일 두 차례 곤장을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다.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12일 갑오개혁정부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이 고종에게 조병갑 재수사를 요청하고 고금도에 관리를 보내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음력 5월 4일 고종은 개혁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을 모조리 거부하고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고 선언했다.(‘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 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그리고 음력 7월 3일 동학과 관련돼 유배형을 받은 인물 279명이 일괄 석방됐다. 그 가운데 민영휘, 민영주, 민형식, 민병석, 민응식 같은 척족 여흥 민씨들이 있었고 동학의 먼 원인을 제공한 조병식과 동학을 폭발시킨 집안 동생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조병갑은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6개월 뒤인 7월 2일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고공판이 있었다. 최시형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 배석판사 2명 가운데 한 명이 조병갑이었다. 1904년 6월 20일 조병갑은 황실 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에 임명됐다.(같은 날 ‘황성신문’) 1907년 현재 조병갑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충청도 청양에 살았다.(1907년 7월 3일 ‘황성신문’) 청양 북쪽 예산 대흥면은 양주 조씨 집성촌이다. 조병갑 큰아버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 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대흥향토지편찬위원회, ‘대흥향토지’, 2017, p527)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은 1885년에 죽었는데, 부인 이씨와 함께 산 너머 공주 신풍면 사랑골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조규순 묘비석’) 1970년 그 후손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공식 기록에서 종적이 끊긴 조병갑은 바로 그 아버지 옆 능선에 묻혀 있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물(石物) 하나 없지만 땅은 양지바르다. 두 무덤이 있는 산기슭과 마을 앞쪽 임야는 모두 양주 조씨 조규순 후손 명의로 등기돼 있다. 주인을 알리는 석물은 없지만, 마을 주민에 따르면, 해마다 봄이면 답사 단체가 무덤을 찾는다. 평화롭게, 근대사 물줄기를 바꾼 관리 하나가 그렇게 잠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