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753sTj-Xt8o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갑옷과 400년 전 일본 히라도
2023년 1월 11일 영국 총리 리시 수낙(Sunak)과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영국 런던타워에서 일본 갑옷 하나를 관람했다. 갑옷은 410년 전인 1613년 9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셋째 아들인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秀忠)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에게 준 선물이다. ‘410년 전’이다. 선물을 받아온 사람은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소속 클로브(Clove) 호 선장 존 새리스(Saris)다. 새리스는 1613년 일본 나가사키 히라도(平戸)에 무역대표부 격인 영국상관을 개설했다.
상관 개설에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사무라이의 힘이 컸다. 미우라 안진은 영국인이다. 영국 이름은 윌리엄 애덤스(Adams)다. 이보다 13년 전인 1600년 4월 12일 일본 해안에 난파됐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리프데호 항해사였다. 애덤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 고문이 됐다. 사무라이 신분도 받았고 이름도 받았다. 받은 그 이름이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다. ‘안진(按針)’은 도선사라는 뜻이다.
영국상관이 설립되고 53년 뒤인 1666년 9월 6일 이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8명이 히라도에 상륙했다. 13년 전인 1653년 바타비아(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나가사키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사라진 사람들이다. 행방이 묘연했던 선원들이 무사귀환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훗날 이들 가운데 항해사가 13년 동안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13년 28일 동안 우리는 광대처럼 춤을 췄고 땔감을 구했고 풀을 벴고 담장을 만들었고 논에 물길을 만들었다.’ 그들이 억류됐던 나라는 조선이었고, 이 보고서 제목은 ‘하멜 표류기’다. 자, 2023년 런던타워에서 영·일 두 나라 총리가 마주한 갑옷과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과 네덜란드인 광대 헨드릭 하멜 이야기.
17세기, 교류의 시대
지난 1월 11일 영국 총리실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은 흥미롭다. 영일 양국 총리가 런던타워에서 일본 갑옷을 감상하는 사진인데 설명이 이렇다. ‘1613년 첫 번째 잉글랜드 통상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영국 총리 수낙은 일본 ‘닛케이신문’에 이렇게 기고했다. ‘우리는 미래를 보고 있지만 영일 관계는 과거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400년 전 제임스 1세가 받은 이 갑옷과 교류는 새 시대 영일 관계 중심에 있는 안보와 번영을 상징한다.’(2023년 1월 12일 ‘닛케이 아시아’)
15세기 포르투갈이 문을 연 대항해시대는 ‘평면 지구에 고립돼 있는’ 동과 서를 이어 붙였다. 1543년 극동에 있는 일본에 포르투갈인이 화승총을 전하고 이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신부, 상인들이 일본에 진입했다. 일본은 1582년 ‘견구소년사절단’이라는 소년 4명을 바티칸으로 보냈다. 새로운 시장을 찾아 유럽인이 아시아로 밀려들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끼어들었다.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의 표류
1567년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개전과 함께 공화국을 선포한 네덜란드는 유럽 각국에 의해 독립이 실질적으로 인정되면서 통상 전쟁에도 뛰어들었다. 1602년 영국에 이어 무역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유럽 각국에 선원 모집 공고를 내걸었다. 그 공고를 보고 런던 빈민가 출신 사내 윌리엄 애덤스가 항해사로 지원했다. 1598년 6월 24일 로테르담을 출항한 선단 5척 가운데 두 척은 스페인 해적에 나포됐고 한 척은 돌아갔다. 한 척은 태평양에서 침몰했다. 애덤스가 탄 리프데호는 태평양을 헤매다 2년이 지난 1600년 4월 12일 일본 동쪽 가마쿠라 해변에 표착했다.(가일스 밀턴, ‘사무라이 윌리엄’, 조성숙 역, 생각의 나무, 2003, p11) 무기 가득한 배에서 피골이 상접한 거렁뱅이 24명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음식을 준 뒤 이들을 최고 권력자가 있는 오사카로 보냈다. 권력자 이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이미 일본에 우글거리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신부들은 ‘신학의 화약통’인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보고 경악했다. 예수회 신부들이 이에야스에게 단단하게 일렀다. “일본에 해악을 끼치는 신교도 악마다. 죽여라.” 쇼군은 듣지 않았다. 며칠 애덤스를 감옥에 가뒀지만 곧 석방했다. 이에야스와 애덤스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지구를 도는 여러 항로와 선박에 대해 한밤중까지 얘기했다. 영국과 전쟁과 평화와 모든 종류의 짐승과 천국에 대해 물었고 개신교도 악마는 소상하게 대답했다. 애덤스는 목숨을 건졌다.
애덤스가 활짝 연 일본의 교류
1603년 도쿠가와가 내전에서 승리했다. 도쿠가와는 쇼군에 취임했다. 에도(江戶·도쿄)에 있는 도쿠가와 막부는 애덤스를 막부 외교 고문에 임명했다. 영국으로 돌려보내달라는 청원은 거부됐다. 대신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이라는 이름과 쇼군 알현권을 가진 상급무사 하타모토 신분과 영지와 농노를 받았다. 가난한 영국 선원이, 말하자면, 귀족이 되었다.
동남아에 식민지를 만든 네덜란드와 영국이 ‘영국인 애덤스가 죽지도 않고 사무라이가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우라 안진을 통해 네덜란드, 영국과 통상하게 됐다. 1604년 애덤스는 이에야스 명으로 80톤짜리 유럽식 선박을 건조했다. 1609년 120톤짜리도 건조해 성공리에 진수시켰다. ‘산 부에나 벤투라(San Buena Ventura)’로 명명된 이 배는 1610년 일본에 난파된 스페인 함대에 임대돼 태평양을 건너 뉴멕시코에 도착했다.(가일스 밀턴, 앞 책, p149) 배에는 이에야스가 고른 일본인 22명이 타고 있었다.
1613년 이에야스가 은퇴하고 아들 히데타다가 쇼군에 올랐다. 그해 센다이번 상급무사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가 자체 제작한 500톤짜리 범선 ‘다테마루(伊達丸·스페인명 산 후안 바우티스타)’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하세쿠라 사절단 180명은 도쿠가와 막부의 교역 요청 친서를 휴대했다. 사절단은 멕시코에 이어 스페인과 바티칸까지 방문한 뒤 1620년 귀국했다. 일본과 세계의 ‘교류(交流)’. 영국인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에게 무역과 조선 자문을 맡긴 결과였다.
히데타다의 갑옷과 불쌍한 하멜
1611년 4월 18일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클로브호가 런던을 떠났다. 배에는 아시아 제국 군주에게 보낼 국왕 제임스 1세의 통상 요청서와 선물이 실려 있었다. 일본 국왕에게 줄 선물은 망원경이었다. 1612년 10월 바타비아 반탐에 도착했을 때 선장 새리스는 ‘일본에 영국인이 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영국인이 반탐 지역으로 보낸 편지에는 “내가 잘 산다, 영향력이 있다, 일본은 자원이 무궁무진하다” 따위 내용이 가득했다. 그리고 해를 넘긴 1613년 6월 10일 클로브호가 나가사키 히라도섬에 나타났다. 7월 어느 날 소문만 무성하던 영국인 사무라이 애덤스가 히라도에 나타났다.
9월 8일 애덤스 안내를 받으며 이들은 에도 부근 시즈오카에서 은퇴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에야스 보좌관이 바로 애덤스였다. 그리고 9월 17일 새리스는 에도에서 쇼군 히데타다를 만났다. 새리스는 쇼군에게 망원경과 제임스 1세 통상 요청서를 바쳤다. 9월 19일 저녁 히데타다가 제임스 1세에게 보내는 답서와 갑옷 두 벌과 장검(長劍) 한 자루를 답례품으로 새리스 숙소로 보내왔다.(J. Saris, ‘The voyage of Captain John Saris to Japan, 1613′, the Hakluyt Society, London, 1900, pp. 129~134 ) 이에야스가 애덤스에게 “이제 클로브호를 타고 귀향해도 좋다”고 했지만 ‘일본인 미우라 안진’은 고민 끝에 일본 잔류를 택했다. 애덤스는 막부를 떠나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히라도 영국상관 개설에 참여했다. 런던 빈민가 사내 윌리엄 애덤스는 영향력과 재력이 있는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으로 1620년 히라도에서 죽었다. 무덤도 히라도에 있다. 함께 일본에 정착한 동료 얀 요스텐(Jan Joosten)은 1609년 히라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을 개설했다. 네덜란드 상관은 1641년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상관을 옮겼다. 데지마는 이후 일본 근대화의 근원지가 됐다. 얀 요스텐은 1623년 네덜란드로 복귀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떠났다가 입항이 거부되자 일본 귀환 도중 익사했다.
임무를 완수한 새리스는 일본을 떠나 이듬해 9월 런던에서 제임스 1세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하고 갑옷 2벌을 헌상했다. 그 갑옷을 한 달 전인 21세기 1월 영국과 일본 총리가 나란히 서서 구경했다. 저 두 리더가 갑옷 앞에 서기까지 미우라 안진, 윌리엄 애덤스 발자국이 찍혀 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근대화의 길목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일본 메이지유신 지사들은 바로 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를 목격했다. 교류가 가진 힘이 이렇게 묵직하고 강하다.
짤막하게 우리네 하멜 사연을 들어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 항해사인 하멜은 1653년 8월 16일 조선 제주도에 표착했다. 13년 먼저 표착했던 벨테브레이 박연에게서 하멜은 “이 나라는 한번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못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 하멜을 비롯한 생존자 8명은 양반집에 불려가 광대춤을 추고 땔감을 줍고 잡초를 베고 무너진 담장을 수선하고 논에 댈 물길을 만들면서 이를 갈았다. 그러다 1666년 9월 4일 전남 여수에서 미리 사둔 어선을 타고 탈출했다. 이틀 만인 9월 6일, 조선 억류 13년 28일 만에 뭍이 보여서 상륙해 보니 그게 66년 전 애덤스가, 53년 전 새리스가 상륙했던 그 히라도가 아닌가.(헨드릭 하멜, ‘하멜 표류기’, 김태진 역, 서해문집, 2003, p76)조선 정부는 그 13년 동안 이들을 외교 고문으로 고용하기는커녕 중국 사신에게 들킬까 봐 전남 강진, 여수 등지로 쫓아 은폐하고 망각해 버렸다. 하멜이 불쌍하고 조선이 불쌍하고 대한민국이 기적이다. 무엇이 기적을 만들었는가. 간단하다. 교류가 힘이고 내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