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SK에너지·GS칼텍스·S오일·현대오일뱅크의 작년 석유 제품 수출액이 570억달러에 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상 최대치였다. 원유를 100% 수입해오는 나라에서,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석유 정제 제품 수출은 반도체(1292억달러)에 이어 품목 2위에 올랐다. 자동차 수출(530억달러)보다 많았다. 정유 회사들이 돈을 벌자 야당에서 ‘횡재세’까지 들고 나왔다. 한국 정유 산업은 박정희 정부 이래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성장했다. 특히 울산·여수·대산에 대단위 정유 공장과 석유화학 기업들을 집결시킨 것이 비결이었다(석유협회 조상범 실장). 설비 규모 세계 랭킹 5위 공장 가운데 세 곳이 한국에 있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될 부분이 있다. 2000년대 들어 환경부가 대기 환경 규제를 조이면서 석유 제품의 기준치를 가혹한 수준까지 강화했다. 그것이 정유 산업의 혁신 투자를 촉진시켰다는 사실이다. 기폭제가 된 것은 2002년 3월 공개된 환경부의 ‘수도권 대기 환경 특별대책안’이었다. 오염물질 총량제, 경유차 매연여과장치(DPF) 의무화와 함께 자동차 연료 품질기준 강화가 포함됐다. 황 함유량을 경유는 기존 430ppm에서 15ppm으로, 휘발유는 130ppm에서 역시 15ppm까지 낮추겠다고 했다. 관계 부처 협의 등을 거쳐 ‘경유 30ppm, 휘발유 50ppm’으로 2006년부터 시행됐다. 2009년엔 휘발유·경유 모두 10ppm으로 한 번 더 떨어뜨렸다. 환경부의 2002년 실측치를 보면 당시 휘발유의 황 함유량은 평균 31ppm, 경유는 206ppm이었다. 요즘 휘발유, 경유는 모두 8ppm 아래 수준이다. 당연히 수도권 대기질(質)은 좋아졌다. 특별대책안이 등장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서울 미세 먼지(PM10) 평균 농도는 공기 ㎥당 76㎍에서 41㎍까지 개선됐다.
대기 특별대책이 등장하자 정유사들은 초저유황유 공급 기준에 맞추기 위해 대대적 투자를 했다. 당시 GS칼텍스의 관련 업무 책임 임원이었던 홍현종 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KBCSD) 사무총장은 “경유차 매연여과장치는 연료의 황 성분이 많으면 필터가 막혀버렸고 이걸 해결하려 환경부가 저유황유 공급을 밀어붙였다”고 했다. 환경부 대기국장으로 특별대책 실무를 맡았던 고윤화 전 기상청장은 “중질유 분해 시설에 일찍 투자했던 S오일은 협조적이었지만 GS칼텍스와 SK에너지는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고 버텼다”고 회고했다. 특히 인천 정유 시설이 노후했던 SK가 완강했다는 것이다.
정유사들은 세트당 1조~2조원이 드는 탈황·중질유분해 설비를 몇 세트씩 투자해야 했다. 정유 설비의 고급화를 이루면서 수출이 급성장했다. 2002년 64억달러였던 4대 정유사 수출 규모는 2006년 200억달러, 2010년 300억달러를 돌파했다. 2012년엔 540억달러로 반도체·자동차를 따돌리고 품목 1위에 올랐다. 그뒤 10년 부침을 거듭해오다 작년 사상 최고 실적을 올린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11월 “환경부도 환경산업부가 되라”고 촉구했다. 규제 기관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기업을 돕는 조직이 되라는 주문이었다. 최근엔 “내가 대한민국 1호 영업 사원”이라고 했다. 환경부는 이에 호응했다. 신년 업무보고에서 ‘녹색산업 올해 20조원, 임기 동안 100조원 수출’이란 목표를 내걸었다. 환경장관은 “환경수출부가 되겠다”는 말도 했다. 장관·차관은 요즘 수출 세일즈에 바쁘다.
정부의 기업들 해외 수출 지원은 바람직하다. 대통령이 국민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준다며 박수 치는 국민이 많다. 다만 일각의 우려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경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경제를 희생해서라도 맑은 물, 깨끗한 공기를 지켜야 할 경우가 있다. 또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에서 첨단 기술이 나오고 그것이 수출 실적을 끌어올릴 수 있다. 정유 산업이 그런 경우였다. 산업부를 자동차 액셀러레이터에, 환경부를 브레이크에 비유해보자. 운전자는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사용해야 한다. 브레이크를 뽑아버리고 액셀러레이터만 밟아서 자동차가 적시에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규제 가운데 타파해야 할 규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공무원이 자기들 권한 늘리려는 규제, 책임 안 지려고 기업에 쓸데없는 족쇄 채우는 규제가 그렇다. 반면 세계의 수요가 바뀌어가는 흐름에 한시라도 빨리 올라타기 위해 선도적으로 필요한 규제도 많다. 그런 규제는 단기적으론 기업에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기업을 살리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주면서, 국민 행복도 키워주는 규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