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7회>

<2022년 7월 27일, 대만의 군대가 신베이(新北)시에서 중국 군대의 상륙을 저지하는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대만은 해마다 중국의 상륙작전에 맞서 한쾅(漢光)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AP>

중국형 발전 전략의 정체는 1930~40년대 일제의 방식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 개발도상국을 향해 “차이나 모델(China Model, 中國模式)”을 공격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주의가 아니라 중국 방식의 국가-주도 성장 전략을 써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주장이다.

2014년 11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은 “차이나 모델 2.0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은 소련 모델을 따랐을 뿐 중국 고유의 발전 전략이 없었다. 따라서 “차이나 모델 1.0판”은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 시대의 성장 전략을 이른다. 사설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시진핑 정권은 업그레이드된 “차이나 모델 2.0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덩샤오핑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차이나 모델 2.0판”이란 과연 무엇인가?

<2019년 10월 1일 톈안먼 광장. 사진/AFP-JIJI>

지난 10여 년 시진핑 정권은 시장 지향의 경제개혁을 거부한 채 경제에 대한 정부 간섭을 늘리는 이른바 “국진민퇴(國進民退)”를 추진해왔다. 그 관점에서 보면, “차이나 모델 2.0판”이란 결국 자유화, 민주화, 탈규제 등의 시장주의 개혁 대신 국유 자산의 비중을 늘리고 국유 기업의 덩치를 키우는 강화된 국가주의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차이나 모델 2.0판”로 재포장했을 뿐, 하나도 새롭지 않다. 학자들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흔히 보이는 정부 주도의 발전 형태를 “권위주의 개발독재,” “민주화 없는 경제성장,” “비민주적 발전 전략” 등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해왔다.

그 역사적 연원을 추적해 보면,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을 거쳐, 독일제국의 “프로이센 모델(Prussian Model)”로 소급된다. 아래 살펴보겠지만, 덩샤오핑이 썼던 “차이나 모델 1.0판”은 150여 년 전 메이지 시대 일본이 비민주적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을 모방했고,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 2.0판”은 1930-40년대 군국주의 일제의 방식을 그대로 빼닮았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권위주의적 연성 독재 통해 발전...중국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시대, 특히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30년간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신흥산업국(New Industrial Countries, NICs)은 공통적으로 국가가 금융 및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합리적 전문 관료 집단의 경제계획에 따라, 수출 중심의 개방형 발전 전략을 통해서 단기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급속한 경제 발전을 주도한 동아시아 국가를 흔히 “동아시아 발전국가(East Asian developmental state)”라 부른다.

궁핍한 국민을 되레 착취하는 “약탈적 국가(predatory state)”나 시장의 규칙을 제도화하고 법의 지배만을 추구하는 “규제 국가(weak state)”와 달리 “발전국가”는 엘리트 전문 관료들이 직접 산업 정책을 세우고, 민간 경제 주체와의 상호 조율 속에서 효율적으로 자본과 자원을 배분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을 달성한다.

<2차대전 이후 복구에 나선 일본의 모습. 사진/공공부문>

동아시아 최초의 발전국가로서 일본은 2차대전 이후 다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뤄서 냉전 시대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전범이 되었다. 일본의 급속한 발전 모델을 따라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발전국가의 궤도에 올라탔다. 제1의 물결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경제 발전이었다. 제2의 물결은 말레이시아와 태국의 성장이었고, 제3의 물결은 1978년 이후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과 뒤따른 베트남의 경제성장이었다.

현재 중국은 여전히 비민주적 발전국가로 남아있다. 그 점에서 2차대전 이후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일정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다만 오늘날 중국의 전체주의적 통치는 지극히 예외적이고, 일탈적이다. 과거 한국과 대만의 독재정권과 오늘날 싱가포르의 통치가 권위주의적 연성 독재라면,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전체주의적 경성 독재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국가는 전후 일본의 발전국가가 아니라 군국주의 일제의 발전국가와 더 비슷해 보인다.

<“미국 원조 양곡 입하 환영식. 대한민국 농림부.” 사진/공공부문>

독일에 간 이토 히로부미 “저녁에 죽어도 좋을 도를 들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80년대 일본에선 의회 확립, 국민의 기본권 보장, 참정권 확대, 조세 감면 등을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는 민주정이 아니라 군주적 과두정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에선 천황을 옹립한 메이지 번벌(藩閥)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882년 메이지 정부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독일을 방문해서 일본의 헌정 체제에 관한 조언을 구했다. 이토는 특히 빈 대학의 사회과학자 슈타인(Lorenz von Stein, 1815-1890)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토의 회고에 따르면, “슈타인을 만난 날 아침 저녁에 죽어도 좋을 듯한 도(道)를 들었다.”

<1860-62년 일본의 에도를 방문하는 프로이센 사절단. 그림/공공부문>

슈타인은 이토에게 “국가의 궁극 목적이 소수의 윤리적 엘리트가 열등한 다수 국민을 보살피는 것”이며, 의회주의는 계급 갈등을 일으키고 사회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리적 국가만이 사회 분열과 체제 전복을 막을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국가이론이었다. 슈타인은 그러한 국가 체제를 사회적 군주제라 불렀다. 이토는 국가란 국민에 복무하는 계몽된 엘리트의 통치 기구라는 슈타인의 정의에 매료당했다. 독일에서 돌아와서 1885년 수상직에 오른 이토는 당장 1886년 엘리트 관료 집단의 육성을 위해 제국대학을 세운다. 1889년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메이지 헌법이 반포되었다.

슈타인의 국가이론은 이토에게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를 동시에 비껴갈 수 있는 일본식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길을 제시했다. 그 길은 민중의 정치 참여가 아니라 소수의 계몽적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비민주적 근대화의 길이었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서 여러 나라에서 추진했던 근대화 전략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래서 이른바 “동아시아 발전국가”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이 생겨났다. 지난 15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는 결국 “일본식 비민주적 근대화/산업화”의 전략을 취했다는 얘기다.

1930년대 아카마쓰 카나메 교수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

이토가 추진했던 비민주적 국가 주도 산업화의 길은 이후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서 동아시아 특유의 발전 모델로 칭송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1930년대 일본 히토쓰바시(一橋) 대학 경제학 교수 아카마쓰 카나메(赤松要, 1896-1974)가 있다. 그는 이른바 “안행(雁行)형태론”을 제창했는데, 여기서 안행이란 우두머리 뒤로 V자로 열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편대의 모습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flying-geese paradigm,” 곧 “날아가는 기러기 떼 패러다임”으로 번역된다.

1935년 “기러기 편대형 이론”을 제창한 아카마쓰는 1940년 징집되어 싱가포르에 배치되었다. 1942년부터 그는 40여 명의 연구자들을 지휘하며 일제의 명령에 따라 동남아 자원 개발 관련 연구를 했다. 1930년대 아카마쓰는 일제의 만주 점령과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의 전체주의적 지배 체제를 긍정했던 인물이다. 진주만 습격 직후에는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의 “날아가는 기러기 떼” 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주도한다는 대동아 공영권의 경제학적 논리가 되었다. 일본이 맨 앞에 날고 그 뒤를 따라가는 기러기 떼의 이미지는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을 정당화하는 커다란 선전의 효과를 발휘했다.

<기러기 편대의 비행 장면. 사진/공공부문>

1961년 아카마쓰의 영역 논문 “세계경제의 불균형 성장”이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이 널리 알려졌다. 특히 1980년대 일본의 비약적 상승세가 이어질 때, 아카마쓰의 “기러기 편대형 이론 이론”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다섯 마리 작은 용들을 설명하는 유력한 패러다임이 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선진 산업국의 기술 혁신이 대외 수출을 통한 국부의 증진으로 이어지면, 미발달 지역은 원자재 수출을 통해서 선진국에서 신상품을 수입하고, 선진국의 혁신 기술이 배워서 스스로 경제성장의 후발 주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선두 기러기를 뒤따라가는 삼각 편대의 기러기 떼처럼 후발 주자 역시 세계 경제에 통합되어 발전의 길을 갈 수가 있다. 냉전 시대 뒤늦게 세계 시장에 편입된 한국과 대만이 점차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아 최첨단 산업생산국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대표적 실례다.

2차 대전 후 일본은 시장의 자율에 맡기기보단, 전문 관료 집단의, 특히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정부가 직접 경제·산업 정책을 통해 주요 산업을 육성했다. 한국이나 대만의 발전 역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서 이뤘다는 점에서 일본식 발전 모델을 따라갔다. 결국 “동아시아 발전국가론”이란 “프로이센 모델”의 영향 아래서 전개된 “일본식 발전국가론”이다. 그렇다면 “차이나 모델”은 결국 과거 “일본 모델”의 재판이 아닌가? 여기서 전후 “일본식 발전국가론”과 1920-40년대 “쇼와(昭和) 국가주의”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외인성, 한국은 자생성 자유민주주의...중국은?

일본의 현 체제는 패망 이후 미군정 하에서 소위 “맥아더 헌법”을 제정을 통해 군국적 전체주의를 벗어난 외인성(外因性) 자유민주주의이다. 한국과 대만의 현 체제는 권위주의 개발독재의 단계를 거쳐 산업화를 달성하고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거쳐 3차례 이상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룬 자생적 자유민주주의이다.

반면 오늘날 중국은 당·정·군의 전권을 장악한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채택하지만, 보편적 인권과 공민의 기본권은 극도로 제한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주도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한 오늘날의 중국을 일본, 한국, 대만과 함께 묶어 똑같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라 본다면 지나친 일반화다.

2010년 전후해서 중국 안팎의 친중 성향 이론가들은 이른바 베이징 합의(Beijing Consensus, 北京共識)를 말해왔다. 시장친화적 정책을 추구하는 IMF,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등의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에 대항하는 중국 방식의 발전 전략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시장친화적 경제성장 대신 국가 개입을 강화하는 자본주의, 정치적 자유화의 부재, 공산당 영도력의 강화, 강력한 대민(對民)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2019년 건국 70주년을 맞아 톈안먼 광장에 벌어진 열병식. 사진/VOA>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와 국가 자본주의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은 전후 일본의 발달국가가 아니라 1920-40년대 군국주의 일제의 “쇼와 국가주의”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쇼와 국가주의”의 다른 이름으로는 “천황제 파시즘,” “쇼와 민족주의,” 혹은 “일본식 파시즘” 등이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해외 식민지 건설에 나선 일제는 점차 군부의 주도로 반민주적 정치질서와 반시장적 국가 주도의 통제경제(dirigisme)를 추구했다. 1920-30년대 “쇼와 유신(惟新)”은 “텐노(天皇, 일왕)”에게 직접적 독재 권력을 주어 아시아의 절대 군주로 군림하게 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이었다. “쇼와 국가주의”는 결국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물거품이 되었지만, 전후 일본은 국가-주도의 발전 전략을 폐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진핑 시대 “차이나 모델 2.0판”은 전후 일본의 발전방식이 아니라 1920-40년대 “쇼와 국가주의” 혹은 일본식 파시즘과 비슷해 보인다. 시진핑 시대 들어와서 1)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가 되살아났으며, 2) 당·정·군의 총 권력을 독점한 일인 지배가 확립되었다. 3) 공격적인 애국주의가 부상하고, 4)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탄압이 강화되었다. 또한 5)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이 계속 확대되었고, 6)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등 민족주의가 조장되었다. 7) 홍콩의 인권을 짓밟고 대만을 향해 군사 위협을 서슴지 않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 타이쇼(大正) 민주주의(1912-1926)가 무너진 후 군국화의 일로로 내닫는 일제의 망령이 연상된다. 아울러 8) 미국과 유럽의 질서에 맞서 중국 중심의 글로벌 신체제를 세우려는 무리수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을 감행한 말기 일제의 판박이가 아닌가.

돌고 돌아서 시진핑 시대 중국이 패망한 일본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는가. 중국은 1980년대 초 일본 교과서 논란 때부터 본격적으로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조장했다. 분출하는 민주화의 열망을 제압하기 위해선 중화 민족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반일주의는 중화 민족주의를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중국공산당이 과거 중국을 침략한 군국주의 일제의 전체주의적 사회·경제 통제를 답습하고 있음은 기묘한 아이러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