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지정학(地政學) 전략가이자 인구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이 지난 1월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원제: The End of the World is Just the Beginning)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세계화 없이 한국의 경제 부문은 존재하지 못한다. (한국이) 지난 4반세기 동안 보인 인구 구조 없이는 자본 구조나 노동생산성 수준도 유지하지 못한다. 한국은 수출과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고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고령화하고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라며 “2020년대와 2030년대에 점점 악화될 문제들, 즉 에너지 접근, 물리적 안보, 안정적 노동력, 시장과 원자재 접근 등 어떤 문제에든 ‘하나같이’ 한국은 이제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고 했다. 그는 “운송·금융·에너지·원자재·제조업·농업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가속화하며 서로 중첩하는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한 세계에서 한국이 어떻게 버틸지 모르겠다”며 “나는 한국인이 못해낼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한국이 이 난관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부정적 ‘느낌표’를 던졌다. 결국 ‘올 것은 온다’는 메시지다.

먼저 우리는 피터 자이한이 지적한 그런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을 위시해 세계 각국은 세계화의 시대를 접고 자국 이기주의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조 바이든의 미국은 트럼프의 공화당 정부보다 더 자국 우선으로 가고 있다. 미 의회는 국내 공급망을 확보해 국내 생산량을 늘리고 고용을 확대하며 외국 의존도를 낮추는 IRA법을 끝내 통과시켰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난 75년 미국이 앞장서서 유지해온 세계화는 이제 미국 이기주의(America first)에 밀려 퇴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세계화 물결 위에서 미국을 타고 잘나가던 때가 끝났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세계는 점점 보호 장벽을 높이 치고 있는데 우리는 ‘한국이 세계 몇째’라는 등의 숫자 놀음에 붕 떠서 거기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밖의 사정은 세계화의 붕괴가 우리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는데 안의 사정은 온통 싸움판 그 자체다. 우리의 인구 구조는 이제 0.78이라는 경이적(?)이고 기록적인 출산율에 세계 최고 수준의 노령화를 겹으로 껴안고 있다. 이런 구조로는 비록 세계의 문턱이 낮아진다 해도 우리의 공장이 다시 힘차게 돌아가리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고 있다.

그뿐인가. 북한은 이틀이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아대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내에선 친북 세력이 활개 치고 종북 세력이 암약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간첩이 보란 듯이 나대고 있다. 한 정치 야망인의 비리가 몇 년째 온 나라를 둘로 갈라놓는가 하면 정치판은 그야말로 매일매일 ‘너 죽고 나 죽자’다. 국민 생활을 다루는 어떤 법안 하나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밖에서 덮쳐올 ‘한국의 붕괴’ 조짐에도 나 몰라라다.

우리가 세계화의 붕괴에서 살아남는 길은 정녕 없는가? 세계화의 붕괴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국민과 정치권이 공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미국이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들과 같이 가는 것이 세계 평화와 안정의 길이라는 것을 인식토록 유도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몸은 대륙(중국)에 붙어있고 머리는 대양 건너(미국)에 두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천 년 넘은 중국과의 역사는 고난과 치욕과 사대(事大)의 것이었음에 비해, 해방 후 75년 미국과의 동행은 이 땅 최초의 삶다운 삶을 허락했다. 이런 역사는 우리의 선택을 자명하게 한다. 지금으로서 우리는 미국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대일 강제 징용 피해 보상 문제에 해법을 제시한 것도 한국이 동북아에서 한·미·일의 안보 공조 의지를 확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그들이 아무리 자국 이기주의로 가더라도 중국의 신(新)패권주의의 확장을 막는 데 한국 등 동아시아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과 한국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미국이 자국 이기주의에만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꿩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은 그런 미국의 자세, 한국의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적(展示的) 계기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