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70회>
중국 중앙방송, 티베트 수도 라싸를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아... 의도는?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는 어디인가? 2006년에서 2012년까지 중국 중앙방송은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를 6년 연속으로 전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았다. 2008년만 예외였는데, 그 당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 사람들이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을 수 없었던 중앙방송은 상하이, 베이징에 이어 3등으로 선정했다.
중국중앙방송은 도대체 왜, 무슨 근거로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로 선정했을까? 그 정치적 의도는 무엇일까? 인도 캘커타 대학의 지그미 라마 교수(Jigme Yeshe Lama)는 “아직도 국가 건설이 진행 중인 티베트 지역은 오늘날 중국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이기에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이 중앙방송을 사주해서 라싸를 인위적으로 가장 행복한 도시로 꼽았다고 분석한다.
가령 중국 국무원은 2013년 백서에서 티베트인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력 덕분에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에 도로를 깔고, 도시를 건설하고, 통신망을 설치하고, 야간 비행을 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는 등, 경제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낙후된 농촌과 목초지에 식량, 숙소 및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45세 이상 주민에게 무상 의료보험을 보장했다는 선전도 잊지 않았다.
그 선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목초지에서 자유롭게 유목 생활을 영위해 온 티베트 사람들을 협소한 촌락에 묶어놓고 정착시키려는 중국공산당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고산지의 광활한 초원을 오가며 대자연 속에서 신령과 소통하며 목축을 해온 유목민들이 광야와 짐승과 물과 바람을 잃고 비좁은 현대식 촌락에 강제로 갇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역으로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천연광물을 확보할 수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티베트를 더욱 강력하게 통합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라싸를 가장 행복한 도시라 선전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을 포섭하려는 전략도 없진 않지만, 실제로는 전 중국인, 나아가 중국 밖의 전 세계를 향해 티베트 식민화의 성공을 홍보하는 목적이다. 그러나 티베트 라싸가 중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라는 중국공산당 매체의 일방적 선언을 곧이곧대로 믿는 중국 인민이 과연 몇 %나 될까?
193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티베트족이 겪은 통한(痛恨)의 역사
물론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군사력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는 유구한 티베트 유목민의 전통과 종교적 세계관과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있다.
2011년 11월 3일 미국 하원 탐 랜토스(Tom Lantos) 인권위원회에서 키르티 사원의 주지승 키르티 린포체(Kirti Rinpoche)는 지난 세기 3세대에 걸쳐서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인들에게 가한 인권유린과 잔혹 행위를 간명하게 정리해서 증언했다. 그의 연설문을 기초로 지난 한 세기 중국공산당의 침략과 식민 지배 아래서 티베트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통한의 역사를 살펴보자.
#제1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35년 국민당군에 밀려서 대장정에 오른 공산당군(共産黨軍, 당시 공식 명칭은 紅軍)은 티베트고원 암도(Amdo, 安多, 현재 쓰촨성 북동부)의 아바(阿壩, Ngaba)를 지나갔다. 아바 지구를 점령한 공산당군은 2천 명 이상의 승려가 수도하는 라텅(Lhateng) 사원을 파괴했다. 얼마 후 공산당군은 현재 쓰촨성이 서쪽 끝에서 티베트 자치구와 맞닿는 곳에 있는 데르거(Derge, 更慶鎭)의 500년 고찰 데르거 사원(更慶寺)에서 많은 승려와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공산당군은 군비 및 식량 갹출의 명목으로 그 지역 여러 고찰의 곡창을 약탈했다. 그 결과 티베트에서 최초로 기근을 발생하여 사람들은 나뭇잎을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이 지역 티베트인들은 그 지역을 점령한 공산당군에 맞서서 싸웠지만, 수적 열세에 밀려서 패배했다. 이때 키르티 사원의 주지를 포함한 많은 승려가 총살되었다.
당시 공산당군 사령관 주더(朱德, 1886-1976)는 키르티 사원의 대웅전을 점령하고는 불상과 보살상을 훼손했다. 이때 티베트 사람들은 공산당군을 반종교적 약탈자라 인식했다. 그 결과 아바 지역 티베트인들의 가슴엔 깊은 생채기가 났다. 지난 회(69회)에서 언급했듯, 2009년 이래 160명 가까지 분신의 행렬을 이어갔는데, 그중 25명이 키르티 사원의 현직 혹은 전직 승려였다.
#제2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58년 아바 지역에서 소위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주·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1950년대 중국공산당이 티베트를 통치하며 부르짖은 “민주”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처형하는 인민독재였고, “개혁”이란 전통적 삶의 양식을 송두리째 뿌리 뽑고 고유의 문화를 봉건의 잔재라며 일소하는 반달리즘일 뿐이었다. 그 밑바탕엔 티베트족에 대한 한족(漢族)의 우월의식과 종족 차별이 깔려 있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후 2년 지난 시점 아바 지역에서도 홍위병 조직이 생겨났다. 1950-60년대 정치운동은 티베트인 수십만 명이 구속되어 고문당했다. 또한 수많은 정치 집회에서 많은 티베트인이 인민재판식으로 조리돌림당했다. “낡은 생각, 낡은 관습, 낡은 습관, 낡은 문화”를 모두 깨부순다는 이른바 파사구(破四舊)의 구호 아래서 홍위병들은 오랜 세월 고유의 문화 전통을 이어온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아바 지역에는 1760년 체왕 키야브(Tsewang Kyab)가 세운 메우(Meu) 왕국이 있었다. 그 왕국의 마지막 왕 펠곤 트린레 랍텐(Pelgon Trinle Rabten, 1916-1966)은 1930~1950년대까지 그 지역을 잘 통치해서 지금까지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 아래서 아바 지역은 티베트 고원과 중국 서부를 잇는 상업의 요충지로서 번창했는데······. 문혁의 광풍 속에서 펠곤 트린레 랍텐은 봉건 영주로 몰려서 고문당하다가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 밖에도 많은 티베트인이 사형당했다.
키르티 린포체는 당시 중국공산당이 전 티베트인을 절멸시키려는 문화 파괴와 인종 박해를 자행했다고 고발한다. 티베트 전통의 사원과 종교적 유산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어 장소명과 인명을 모두 중국어로 교체했다. 티베트 언어와 문화에 대한 중국공산당 특유의 말살 정책이었다.
또한 천연자원이 풍부한 아바 지역의 환경도 파괴되었다. 무분별한 벌목으로 무성했던 원시의 밀림이 훼손되어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터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연재해가 연거푸 일어나서 더는 복구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제3세대 티베트인의 상처
1998년 이후 “애국주의 교육”이 티베트 전역에 몰아쳤다. 아바 지역의 불교 사원에 예외일 수 없었다. 말이 좋아 애국주의 교육이지 티베트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종교적 자유를 침탈하는 정치적 박해일 뿐이었다. 그해 4월 27일, 인도의 델리에서 연로한 티베트인 투프텐 너두프(Thupten Ngodup)가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죽었다.
그러한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중국 정부는 티베트족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티베트 고유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교육에 개입했다.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서 티베트족의 교육기관은 박해를 당해 문을 닫아야 했다. 예컨대 키르티 사원이 운영해오던 학생 수 1200명의 큰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으며, 티베트족의 사립학교는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정부로 넘어갔다. 반면 한족 사원이 운영하는 학교나 한족 사립학교는 간섭받지 않았다. 티베트족이 스스로 티베트 고유의 문화 전통을 전수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이 확연히 보인다.
2008년 3월 16일, 아바 지역의 키르티 사원을 중심으로 티베트족의 평화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중국 공안은 즉시 시위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티베트족 23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 부대에 포위된 키르티 사원은 완벽하게 봉쇄된 채로 사실상 감옥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아바 지역엔 5개 군부대가 들어왔다. 뉴욕의 인권감시단(Human Rights Watch)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바 지역에는 5만의 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아바 지역의 치안 비용은 다른 쓰촨 지역의 두 배에 달한다.
키르티 린포체는 직접 경험한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2008년 3월부터 중공 당국은 키르티 사원의 승려들을 8개 집단으로 나눠서 밤낮으로 애국주의 교육의 수강을 강요했다. 사원에 닥친 공안 부대는 승려들의 숙소를 수색하고, 모든 전자제품을 압수하고, 티베트 불교 성전(聖典)을 난도질했다. 그들은 또 티베트 승려 개개인을 윽박질러서 달라이 라마의 영정을 짓밟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100여 명의 승려가 구속되어서 고문당하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사원의 수호신께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기(祭器)를 강탈했으며, 사원이 중국 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무기를 숨겨놨다는 누명을 써야만 했다. 또 그런 낭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키르티 사원의 승려 두 명, 동그리 사원의 승려 한 명, 고망 사원의 승려 한 명이 고문을 못 이겨 극심한 공포 속에서 자결했다. 키르티 사원의 70세 승려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키르티 사원은 겨울에 늘 거행해오던 중요한 종교 행사를 열 수 없게 되었다. 2011년엔 정부는 티베트족이 전통적인 티베트족 천문학적 계산법에 따라 계획되어 있었던 티베트족 설날 행사까지 금지했다.”
티베트 승려 잇달아 분신... 박해받는 티베트족의 처절한 저항
2011년 3월 16일, 20세 승려 로프상 푼트소크(Lobsang Phuntsok)가 분신했다. 그 후 공안 부대는 키르티 사원은 포위한 후 7개월간 봉쇄를 이어갔다. 포위 상태의 사원에 800여 명의 정부 관원들이 경내로 들어가선 승려들을 대상으로 정치 재교육과 애국 교육 캠페인을 벌였다. 격리되어 외부와의 교신이 전면 두절된 상태에서 사원 내에서 불의의 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경내엔 온통 도청기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공안 부대는 아무 때나 승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며 수색 작전을 펼쳤다. 목줄 풀린 경찰견이 날뛰며 승려들이 물기도 했다. 사원에 침투해서 좀도둑질하는 공안도 있었다.
2011년 4월 21일 대규모 병력이 사원에 들이닥쳐서 300여 명의 승려를 군용 트럭에 싣고 갔다. 끌려간 승려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구금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 지역에 청소년의 출가를 금지하고, 사원의 승려 수를 제한했다.
2011년 8월 15에서 10월 26일까지 9명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비구와 비구니 승려들이 연달아 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분신이 행렬이 이어지면서 국제 사회의 비판이 들끓자 중공 정부는 분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기소해서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2008년 3월 16일부터 2011년 10월 17일까지 아바 지역에서 34명의 티베트인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거나 분신 등의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잡혀간 300여 명 키르티 사원의 승려들을 제외하고도 619명이 구금되었다.
키르티 린포체는 티베트인들에게 분신(焚身)이란 다른 중국인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분신하는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를 향해서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방문을 허락하라! 티베트인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친다.
키르티 린포체는 말한다.
“티베트 젊은이들이 분신한다는 사실이 티베트족이 고통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세계 지도자들과 인권 단체를 포함해서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국가와 인민이 중국 정부를 압박해서 티베트 탄압을 중단하도록 호소하고, 또한 억압이 안정을 보장할 수 없음을 말해달라고 촉구한다. 또한 그들은 티베트 문제의 근본 해법을 찾기 위한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대화를 요구하며 국제단체 및 인권 단체가 여러 티베트 지역 방문을 방문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