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의 해외 연설 중 가장 품격 있었던 것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訪美) 연설일 것이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휴전 이듬해였다. 미국의 원조로 주린 배를 채우던 세계 최빈국 대통령이었지만 이승만은 당당함을 잃지 않고 가는 곳마다 미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중 백미가 한미재단 초청의 뉴욕 연설이었다.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더 많은 원조, 더 많은 자금, 기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의 연설은 한 나라 차원을 넘는 큰 그림의 국제 정세관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싸움이 “생명보다 귀중한 민주 제도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서 미국과 한편에 서서 자유·민주를 위한 싸움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한반도 통일이 우리의 이해 관계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결정적이고 긴박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은 단지 우리의 통일과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에게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을 돕기 위해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연설이 강렬했던 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꿰뚫어본 통찰력 때문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인류 보편적 의미를 지녔다는 역사적 맥락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승만이 초석을 쌓은 한·미의 자유·민주 동맹은 자유 진영의 방파제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기적 같은 성공을 잉태했다.
#2017년 중국에 간 문재인 대통령은 방중 셋째 날 베이징 대학의 연단에 올랐다. 의전 푸대접, ‘혼밥’ 논란, 기자 폭행 등의 구설수가 꼬리 무는 가운데 이뤄진 연설은 친중 사대주의의 고백과도 같았다. 중국을 ‘높은 봉우리’로, 한국을 ‘작은 나라’로 지칭한 문제의 표현도 이 연설에서 나왔다.
“중국은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존재가 빛나는 국가입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한국도 작은 나라지만 책임 있는 중견 국가로서 중국의 꿈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의 연설은 곳곳에서 공산 중국의 실체에 대한 인식 오류를 드러냈다.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시진핑 독재에 대해 “민주 법치를 통한 의법치국과 의덕치국, 인민을 주인으로 여기는 정치철학”이라고 했다. 대만 침공을 공언하고 영토 확장 욕구를 불태우는 패권 국가를 향해 “인류 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 나아가려는 중국의 통 큰 꿈”이라고 추켜세웠다. 6·25전쟁 때 우리 적이었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가 작곡가가 조선인이라는 인연까지 끄집어냈다.
주변국을 중화(中華) 질서 아래 복속시키려는 시진핑 체제의 본질을 문 대통령은 직시하지 못했다.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권위주의 독재에 대해 “민주·법치” 운운하고,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를 담은 ‘중국몽’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역사 발전의 방향성을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이었다. 찬양의 말을 쏟아냈지만 그의 친중 고백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국을 향한 중국의 오만과 냉대는 문 정부 5년 내내 계속됐다.
#지난주 방일한 윤석열 대통령의 게이오 대학 연설엔 ‘과거’가 나오지 않는다. 일제 침탈이나 강제 징용 문제는 한마디 언급도 않은 채 10여 분 연설 내내 건조한 문체로 ‘미래’만 얘기했다.
“여러분 미래 세대가 바로 한일 양국의 미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미래를 생각하고 한국 청년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중략) 여러분도, 저도 좋은 친구를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조금 더 용기를 냅시다.”
윤 대통령이 말한 ‘미래’의 연결 고리는 자유민주주의였다. 69년 전 뉴욕의 이승만처럼, 윤 대통령도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두 나라가 미래를 향하는 것이 동북아를 넘어 세계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했다.
“한국과 일본이 자유,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략) 저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이 관계 개선과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양국의 공동 이익 그리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과거’를 따져 묻지 않은 것이 국내에서 비판을 불렀다. 윤 대통령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말해줄 것이다. 한 나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국내적 특수성보다 보편성의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 더 힘이 있다. 한일이 보편적 가치의 연대를 맺는 것이 글로벌 세계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윤 대통령 말은 진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정성이 일본 국민에게 전달된다면 ‘통 큰 양보’가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