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 기자 생활 몇 년 하다 1979년 정치부로 옮겨 맡은 첫 임무가 외교부 담당이었다. 그 무렵 한국 외교 무대는 미국·UN·일본 딱 세 곳이었다. 중국·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도 일본 문제는 ‘사죄’와 ‘사과’라는 단어와 한 묶음으로 붙어 다녔다.

‘사죄’와 ‘사과’ 뒤치다꺼리하다 외교부를 떠났다가 1983년 외교부로 돌아왔더니 여전히 ‘사죄’와 ‘사과’라는 두 단어가 버티고 있었다. 계기는 나카소네(中曽根康弘) 일본 총리 한국 방문이었다. 총리 취임 후 첫 방문국은 미국이라는 일본 정치의 관례를 깨고 한국을 먼저 방문했다.

미국이 일본에 경제대국에 걸맞은 안보 기여(寄與)를 재촉하던 참이었다. 한국은 이 분위기를 타고 일본에 40억달러 차관 제공을 요구했다. 나카소네는 다소 무리인 듯한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가올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 입지(立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예상대로 레이건-나카소네 회담은 큰 성공을 거뒀고 미·일 동반자 시대를 열었다. 이때도 무슨 ‘단어’로 과거사를 ‘사과’하느냐가 막판 골칫거리였다.

도쿄특파원 시절인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사죄’와 ‘사과’라는 두 단어를 다시 만났다. 올림픽 성공 후 한국을 보는 일본 눈길이 크게 달라지던 때다. 재일교포 권리 보호 등 풀어야 할 문제도 여럿이었다. 그런데도 천황이 무슨 단어로 과거사를 사과하느냐 하는 문제로 막판까지 줄다리기를 벌였다. 산통(産痛) 끝에 태어난 게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낯선 표현이다. 일본어 사전에는 ‘대단히 슬프고 애석해한다’는 뜻으로 나와 있다. 한국 외교장관은 “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느냐’고 묻고 일본 측 반응이 없자 이 표현이 확정됐다.

그러고 8년 후 편집국에서 또 김대중-오부치(小渕恵三) 선언을 지켜봤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절(痛切)히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는 것으로 ‘사죄’와 ‘사과’는 정점(頂點)을 찍었다.

1970년 12월 브란트 서독 총리는 바르샤바 유태인 희생자 묘비에 꽃을 바치다 풀썩 무릎을 꿇었다. 이 장면은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으나 독일 양심(良心)은 우뚝 섰다’고 찬사를 받았다. 1985년 히틀러 패망(敗亡) 40주년을 맞아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은 ‘죄가 있든 없든, 젊은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과거에 저지른) 야만성을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에) 다시 야만성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라고 서독 국민을 설득했다. 이 연설문은 세계 각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현장을 지켜보고도 독일 역사 대가(大家)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장은 ‘독일은 과거를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독일을 너무 사랑하기에 독일이 하나(통일)인 것보다 두 개(분단) 있는 게 좋다(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던 나라가 프랑스다. 그런 프랑스 대통령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자 독일 통일을 받아들였다. ‘독일을 믿으려면 앞으로 다시 40년이 더 필요하다’며 독일 통일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 대처 영국 총리다. 대처는 훗날 회고록에서 ‘내 외교 정책의 단 하나 실책은 독일 통일에 반대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 총명한 정치가도 ‘역사의 덫’을 비켜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한일회담 조인 다음 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우리의 주체 의식과 자세가 얼마나 굳건하냐에 달렸다. 누구든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앞세우면 이 조약은 제2 을사조약이 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일본 배상금과 청구권자금을 받은 나라 중 한국 혼자 성공한 데는 이런 각오와 다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 전기를 쓴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 국민 마음을 연 외교 성공 사례로 덩과 김대중 대통령 방문을 꼽았다. 김 대통령은 일본 국회에서 ‘외환위기 때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도움을 준 일본에 마음으로부터 감사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자신감 없으면 고맙다는 말도 못 하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린 일본 그림에는 서두르다 서툴게 처리된 부분도 눈에 띈다. 그러나 종기를 뭉개고 뭉개다 터뜨리고 만 전임자(前任者)의 무책임과 비교할 허물은 아니다. 역사는 ‘실수’는 용납해도 ‘지각’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다. 민주당 출신 전임자는 지각생이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의 결석생(缺席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