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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군인의 장례식과 모란공원
1945년 8월 15일 오후 1시 경성운동장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일본 천황 쇼와의 항복 선언 직후였다. 장례식 주인은 그달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망한 일본 육군 중좌(중령). 조선인이다.
패전을 눈앞에 두고도 일본 육군은 이 군인을 최고의 예우로 떠나보냈다. 8월 7일 오전 5시 5분 육군요양소에서 사망 선고가 떨어지자 일본 육군은 다음 날 그 유해를 항공기로 경성으로 운구했다.(신조 미치히코(新城道彦), ‘朝鮮王公族’, 中央公論新社(도쿄), 2015, p208) 사망 선고를 확인한 보좌 무관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중좌는 요양소 앞 잔디밭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이기동, ‘비극의 군인들(증보판)’, 일조각, 2020, p672)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조선군관구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와 천황을 대리한 일본 황실 식부차장 보조 도시나가가 참석했다. 이 군인에게는 대좌 계급과 대훈위 훈장이 추서됐다.
8월 10일 일본 궁내성은 관보에 그 사망 소식을 이렇게 게재했다. ‘이우공(李鍝公) 전하가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공습 폭격으로 부상을 입고 7일 전사.’(‘李鍝公殿下薨去の件昭和20年’,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 문서번호 26490)
이우(李鍝). 고종 형 이재면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의 당시 궁주(宮主)며 일본 천황이 책립한 조선 공족(公族)이다. 항복 직후임에도 일본 황실과 육군이 예우를 갖춰 떠나보낸 전주 이씨 왕실 사내다. 그 이우가 잠든 곳은 당시 주소로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다. 운현궁이 가지고 있던 땅이며 흥선대원군과 장남 일가가 묻힌 땅이다. 그 산 너머에도 운현궁 소유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1966년 이우의 아내이자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가 그 땅에 대한민국 최초 사설 공동묘지를 건설했다. 그 공동묘지가 모란공원이다. 복잡다기한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그 땅 이야기.
조선왕공족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신분을 조선 왕족과 공족으로 격하시켰다. 황제였던 순종은 왕(王)이 됐지만 실질은 신분 유지였다. 나라는 사라졌는데 전주 이씨 왕실은 변함이 없었다. 왕실을 없애고 순종에게 대공(大公) 지위를 주려 했던 계획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王) 지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 이완용에 의해 좌절됐다.(고마쓰 미도리(小松緑·전 통감부 외사국장),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도쿄), 1976, p283) 이 같은 조치는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과 함께 발표된 일본 천황 책립조서로 공포됐다.(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부록’)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천황의 명이었다.
고종과 순종 부부,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 4명은 일본 황실에 의해 왕족으로, 순종 동생인 이강 부부와 고종 형 이재면(이희로 개명) 부부는 공족으로 책립됐다. 이에 따라 순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이 됐고 고종은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 되었다. 이강과 이희는 공가(公家)를 창설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보장받았다.
병합 첫해 이들 왕공족 8명이 총독부로부터 받은 세비는 50만엔이었다.(1910년 10월 10일 ‘순종실록부록’) 이후 이들에게는 매년 150만엔이 세비로 지급됐다. 참고로 1914년 일본 제국의회가 편성한 조선총독부 세입예산은 3710만엔이었고 이 가운데 총독부 자체 경비는 339만3109엔이었다. 이왕가가 받은 세비 150만엔은 총독부 자체 경비 절반에 달했다.(‘다이쇼3년 각 특별회계 세입세출예산’, 일본국립공문서관) 왕공족은 결혼과 출생으로 숫자가 증가했다. 해방 때까지 왕공족으로 산 사람은 모두 26명이다.
이우, 박찬주 그리고 박영효
이우는 이희(이재면)의 작위를 이어받은 이희 공가 주인이었다. 원래 이우는 이강의 아들이지만 이희의 아들 이준용에게 후사가 없어서 이희 공가로 입적됐다. 그러니까 운현궁의 주인이다.
1935년 5월 3일 이우가 스물두 살에 결혼했다. 일본이 만든 ‘왕공가궤범’에 따르면 조선 왕공족은 일본 황족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그런데 이우가 결혼한 여자는 일본 황족이 아니라 박영효 손녀 박찬주였다. 조선 왕공족 결혼은 일본 천황 재가 사항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인 박영효는 도쿄로 가서 고위직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고, 결국 1935년 4월 17일 일본 황실은 이를 천황 명에 따라 허락했다.(이기동, 앞 책, pp. 655~656)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우 부부는 다음 날 천황 쇼와를 알현하고 결혼을 알리는 조견(朝見) 의식을 행했다.(요코타 모토코(橫田素子), ‘일본 자료로 보는 이우공 전하의 생애’, 아시아민족조형학보, 아시아민족조형학회, 2015)
이우의 죽음, 그리고 모란공원
이우는 왕공가궤범에 따라 일본 육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천황이 책립한 이 운현궁의 주인이 죽었다. 항복 선언에 결정타가 된 히로시마 원폭으로, 군인 신분인 이우가 전사(戰死)한 것이다. 앞에서 봤듯, 일본은 이 준황족을 최고의 예우를 갖춰 떠나보냈다. 보좌관은 자기를 탓하며 자결했다. 육군은 폐허가 된 일본에서 비행기를 띄워 유해를 운구했고 항복 선언 잔향이 가시기도 전에 육군장으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2년 뒤 태어나 식민시대와 함께 죽은 이우에게 그 융숭한 대접을 탓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이우는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이 강했고 반일 의식 또한 거셌다.(이기동, 앞 책, p647)
해방 이후 운현궁은 이우의 아들 이청이 물려받았다. 대한민국 건국 후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전주이씨 왕실 소유물은 모두 국유화됐다. 운현궁에 살던 이우 아내 박찬주는 운현궁이 황실 재산이 아니라 흥친왕 이희 문중 소유임을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박찬주가 출연한 땅을 토대로 추계예술대학교와 중앙여고가 탄생했다. 박찬주는 두 학교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1966년 박찬주는 남양주에 있는 문안산 기슭에 대규모 공동묘지 겸 공원을 기공했다. 문안산 일대는 역사적으로 운현궁 소유 토지였다. 운현궁은 여러 세월에 걸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운현궁 사람들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1921년에 흥친왕 이희 묘가 이곳으로 이장됐다. 1945년 이희의 공족 계승자인 이우가 묻혔다. 서울 마포 공덕동에서 파주로 이장됐던 흥선대원군 묘도 1966년 이곳으로 재이장됐다. 흥선대원군 묘를 제외한 나머지 묘는 모두 납골묘로 바꿨다. 흥친왕 이희 가족묘에는 ‘황실 가족묘’가 주는 이미지와 달리 납골묘들이 줄지어 서 있다.
1966년 박찬주는 다른 사람과 함께 ‘운현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주소지는 운니동 114번지, 운현궁이다.(1966년 7월 12일 ‘매일경제’) 그리고 그해 9월 24일 모란공원묘역 기공식이 열렸다. 공동묘지 개발지역은 이 가족묘 산 너머 남쪽 기슭 100만평 부지였다. ‘모란’은 흥선대원군묘가 있는 봉우리 모란봉에서 따왔다.
1년이 지난 1967년 12월 운현궁은 운현궁 부지 930평을 일본대사관에 매각하려다 여론에 거센 항의를 받았다. 모란공원 개발을 위해 빌린 돈 4000만원을 갚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정 시가는 1억4000만원이었다.(1968년 2월 13일 ‘조선일보’) 여론에 밀린 정부는 이를 불허했고, 운현궁은 이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일본대사관은 중학동에 있는 다른 대지를 구입해 대사관을 지었다. 매각이 무산된 운현궁 땅에는 일본문화원이 들어섰다. 일본문화원은 지난 3월 현 소유주와 임대 계약을 만료하고 대사관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2019년 이우 부부의 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와 흥친왕 이희 가족묘 지역을 경기도에 기증했다. 이곳에 있던 각종 석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부했다. 해방 직후 묻힌 이우 신도비도 박물관 뒤뜰에 서 있다. 혼란상을 반영하듯,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다.
공원이 문을 열고 박찬주의 할아버지 박영효 묘도 원래 묫자리였던 부산에서 이곳으로 이장됐다. 원래 있던 비석은 납골묘 위에 눕혀져 있고 옆에는 ‘태극기를 만든 사람’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지금 모란공원 주인은 운현궁에서 한국공원개발로 바뀌었다.
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만든 이 모란공원에 숱한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살다 간 사람들도 많다. 온갖 역사가 두루 섞여 있다. 전임 서울시장 박원순 묘 이장으로 논란이 벌어진 터에, 그 땅의 역사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