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들어온 나에게 영어는 항상 가장 큰 고민이었다. 현재 세계 지식의 대다수가 영어로 생산되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서는 늘 영어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강신청을 할 때 강의계획서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영어 논문과 영어 원서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만큼이나 이 글들을 내가 모두 읽어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내게 했다. 외국인 교수님들의 수업을 듣는 것은 더욱 고역이었다. 읽기도 벅찬 나는 말을 해야만 했고, 영어로 글을 쓰기까지 해야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번역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영어를 읽고 쓰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문장을 집어넣으면 ‘외계어’를 뱉는다고 조롱거리 취급을 받았던 구글 번역기는 글을 읽을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조력자가 되었다. 어휘를 적절히 바꿔주고 표현을 매끄럽게 해주는 ‘퀼봇(Quillbot)’도 이제는 영작을 할 때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도구가 되었다. 문장을 하나씩 쓸 때마다 이 표현이 맞는 표현인지를 고심하던 내게 퀼봇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게다가 챗GPT는 또 어떤가. 이 모든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얼마 전 한국어 번역 기능을 추가한 새로운 사이트 딥엘(DeepL)은 구글을 뛰어넘는 매끄러운 번역을 보여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공지능 번역의 확산은 정보와 소통의 흐름을 막는 언어의 장벽을 실시간으로 허물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이 변화는 학술이나 지식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튜브 인기 동영상의 다양한 외국어 댓글의 내용을 클릭 한 번으로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음성 자동 인식과 번역 기능 덕분에 곧 있으면 2시간짜리 영어 강연도 통역을 거치지 않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파도가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역사는 소통의 증대가 상호 이해의 증진만큼이나 갈등과 분열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K팝을 즐기는 전 세계의 팬들이 국경을 뛰어넘는 교류를 주도하면서도, 국적으로 나뉘어 K팝을 매개로 끊임없이 갈등하기도 하는 것은 실시간 번역 시대의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바로미터다.

역설적으로 이럴 때 중요한 것이야말로 외국어 능력일 것이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는 시대에 외국어가 중요하다니 모순되는 말 아닐까. 하지만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넘어 서로의 감정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친밀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번역을 거치지 않은 대면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상대방과 부딪치다가도 얼굴을 맞대고 표정을 바라보며 그의 육성을 듣다 보면 글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더 깊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해외의 정보까지 자유자재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이제 앞으로의 진짜 경쟁력은 더 많은 사람을 잇고 연결하는 네트워킹 능력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기계를 거치지 않은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위한 외국어는 더 중요한 능력으로 부상할 것이다.

얼마 전 일본의 젊은 연구자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나는 바짝 긴장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일본 연구자가 나에게 매우 익숙한 말로 물어왔다. “당신이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환히 웃으면서 그와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친밀한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 번역기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의 가치는 앞으로도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