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壁隙風動),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침범해요(心隙魔侵). 틈이 무엇인고 하니 분열이라.”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27일)을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이 한국 사회에 죽비를 내렸다. 지난 11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성파 스님은 “정치권도 국민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자기만 옳다 우기며 싸우고 있다”며, “맹수들이 사방에서 노리는 지금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란데 갈수록 분열만 깊어져 걱정”이라고 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도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친일, 친일 할 건가. 그때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 처절히 돌아보고 이를 거울삼아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불교계에서는 옻칠 민화와 ‘16만 도자(陶磁) 대장경’을 만든 예술가로, 버려진 장독 5000개를 모아 전통 방식으로 된장 간장을 담는 기인으로 이름난 성파 스님은, 정치나 시국에 관해서는 “나는 아는 게 없다”며 말을 삼가 온 대표적 선승(禪僧)이다. 작년 3월 종정으로 추대됐을 때도 사전에 준비한 원고는 “올라오는 동안 싹 잊어버렸다”며 즉석에서 법문을 하는 파격으로 화제가 됐다. 스님은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대담집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샘터)를 출간했다.
◇경험도, 지식도 지나간 것은 제로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서울로 오시지 않는다고요.
“통도사에 있어요. 총무원장이 있으니 내가 굳이.”
-봉축 법문은 올려보내셨지요?
“특별한 말도 없어요(웃음).”
성파 스님은 15일 낸 봉축 법어에 ‘이 세상 고통은 사랑과 자비의 헌신 없이는 줄어들지 않고, 중생의 고통을 제 몸에 담는 비원(悲願) 없이는 구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종정으로 취임하실 때 즉석에서 법문을 하셨다지요.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아는 것도 없고요. 요새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더 많이 알잖아요? 모두 고등교육 받은 지식인이고, 외국물도 많이 먹고요. 우리처럼 나이도 많고 산에 사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지요.”
-학교에서 그토록 배웠어도 진심으로 알고 깨친 것이 무엇이냐는 질책으로 들립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세상 밖을 모르니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말고, 내 할 일이나 잘하자는 것이지요.”
-종정 추대 법회에서는 ‘경험 많다, 아는 것 많다고 생각하지 말고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하셨습니다.
“그 또한 내게 하는 말이에요.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연륜을 거듭해도 경험이 많다, 지식이 쌓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지나간 거는 제로(0)라. 그래서 항상 지금이 시작이에요.”
-오늘을 함부로, 허투루 살지 말라는 뜻인가요.
“촌음을 아껴 쓰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냐. 책을 한 줄 더 읽든지, 밭에 나가 풀을 매든지 간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한시도 일을 놓지 않는 스님의 손은 두툼한 근육이 잡히는 ‘일꾼의 손’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만히 누워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요. 자연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시도,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요.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라. 간단(間斷)이 있으면 물이 새고 정진이 되지 않아요.”
-’나는 500살 인생을 산다’고도 하셨어요.
“어느 분야든 장인이 되려면 최소 50년이 걸리는데 나는 시간은 없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해야 하니 융단폭격, 동시구진법을 썼지요(웃음).”
-속세에선 이를 일 중독이라 합니다.
“일을 공부라고 생각하면 일 중독이 아니에요. 일하면서 배우니 즐겁고요. 봄이 오면 꽃이 억지로 피는 게 아니듯 말이지요.”
-책에 ’공부가 별건가? 발길 닿는 곳이 학교이고 만나는 사람이 스승이다’라는 대목도 와 닿았습니다.
“급해서 나온 자구지책이라. 요즘 사람들은 학교도 가고 좋은 대학도 가야지요. 나는 (전쟁과 가난으로) 그리 못 했으니 괜히 어깃장을 놓는 거예요(웃음).”
◇죽기로 작정하듯이 살기를 작정하면
-전쟁과 인플레로 세계 경제가 어렵고 서민들 삶이 피폐합니다.
“원인 없는 병이 있나요. 인과응보.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 그걸 치료해야겠지요.”
-청년들은 취업난, 주거난 등으로 힘들어합니다.
“나는 전기 없고 전화도 없던 시절에 살아서 그런지 (청년들 얘기를 하면) 자꾸 말이 막혀요. 내가 왜정을 겪고 6·25를 겪고 학교도 다닐 수 없던 배고픈 시절을 보내서 그럴 거예요.”
-지금이 그렇게 힘든 시대가 아니라는….
“직장이 없다고 하잖아요. 여기는 일손이 없어서 난리예요. 그런데 젊은이들은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못 하겠다고 해요. 시골에선 외국인 노동자들 아니면 농사도 못 짓고 아무것도 안 되는 판인데요. 그러니 얼마나 답답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전세 사기 때문에 30대 청년이 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하듯이 살기를 작정하면 이겨낼 수 있어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 없는데 그걸 선택한다면 못 살 이유도 없지요. 죽을 힘을 다했다는 말이 있지요? 죽을 힘을 다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죽을 만큼 결심하고 살기를 택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중국도 맹수고, 미국도 맹수라
-요즘 정치는 잘하고 있습니까.
“동구 앞에 장승이 있어요. 100년 동안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마을 사람들 떠드는 온갖 얘기를 듣지만 달다 쓰다 맵다 소리 하지 않지요. 그게 장승이라.”
-그래도 정치인들이 스님을 뵈러 오지 않습니까.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오셨지요?
“앉아서 차만 마셨지요. 내가 정치를 모르니 대화 자체가 안 돼요. 잘했다, 못했다 그런 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정치도 예술처럼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님이 무릎 꿇고 옻에 돌가루 뿌려가며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리듯 정성을 다해.
“자기들은 하느라고 하는 걸 거예요(웃음).”
-국민들 기대엔 턱없이 부족하죠.
“못하지요. 그런데 국민들도 어느 정도는 아량을 보여야 해요.”
-무슨 뜻인가요.
“내가 처음 일본 가서 공부할 때 일본과 미국의 무역 마찰이 있었어요. 일본 사회에서 미국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총리가 NHK에 나와서 미국 물건을 제발 좀 사달라고 해요. 한국에서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으면 난리가 났겠지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정치인은 직업상 저렇게 말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만남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한국 대통령이 일본에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시시콜콜 따지잖아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싫어도) 저리 말하는 거다 여기면 돼요. 더 큰 그림을 봐야지요.”
-스님 또한 일제강점기를 사셨습니다.
“현실은 현실이고, 과거는 과거라. 친일이다 뭐다 시비만 하고 있으면 진보(進步)가 없어요. 일본군에 처녀 공출되지 않으려고 밤에 이십 리 산길을 넘어가 결혼식 올리는 걸 나는 눈으로 보고 자랐어요. 국가가 없으면 그리 되는 거라. 그러니 그때 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는지 돌아보고 다시는 그리 되지 않도록 해야죠. 이조 말기에도 서로 물고 뜯고 하다가 외침을 당한 거예요.”
-중국에서도 오래 공부하셨지요?
“중국을 적대시해서도, 매달려서도 안 되니 난감하지요. 중국인들 속성은 뭐든지 흡수 통합하려는 거라. 중국화하는 것. 티베트도, 신장도 해방시켜 주겠다며 들어가 죄다 점령해 버렸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해요. 중국도 맹수고 미국도 맹수라. 그들을 당당히 대하려면 분열부터 끝내야 해요.”
◇피카소도 별거 아이데
-6·25로 중학교에 못 가고 동네 서당을 다니셨다지요? 3년 만에 사서삼경을 떼셨고요.
“나는 그 책을 쓴 사람이 되어서 책을 읽어요. 야구장 가면 그 안에서 뛰는 선수가 된 것처럼 관람을 하잖아요? 책도 그래요. 옛사람과 만나서 노는 심정으로, 떠받들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해요. 맹자를 공부할 땐 맹자가 되고, 공자를 공부할 땐 공자가 되고.”
-40대 초반에 통도사 주지가 되셨어요. 산문을 세워 경내에 있던 여관과 식당을 내보내고, 영축산 경지도 정비하니 주민들이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다고요.
“어른들 말 잘 듣는 사람을 ‘지당대신’이라고 해요. ‘지당하십니다’만 하고 임기를 채울 것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 사흘도 못 가서 그만둘 것인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지요(웃음).”
-그때 이미 절의 자급자족을 주장하셨어요. ‘시주 물은 쇠 녹인 물 마시듯 하라’ 했지요.
“땅이 있으니 승려들도 농사를 지어야지요. 밭도 갈고 트랙터도 몰고. 그걸 울력이라고 해요. 통도사엔 사계절 울력이 많아요. 수행의 한 방법이지요.”
-16만 도자대장경에 고려 장지도 재현하고, 사찰 최초로 성보박물관도 세웠습니다. 수행은 안 하고 쓸데없는 일 벌인다고 혼도 많이 나셨다고요.
“내가 이래 쪼맨해도 간이 커요(웃음).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미리 겁먹고 못 하진 않아요. 그런데 절은 한국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라. 불교를 모르고 우리 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요. 욕을 먹어도 밀어붙인 이유지요.”
-요즘은 ‘종이책 무한대 모으기’를 시작하셨다고요.
“사람들이 핸드폰만 보고 책을 안 읽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한자를 모르듯 문자를 모르는 미래가 올지도 몰라요. 그런데 책이 애물단지가 됐어요. 학자들은 유학 가서 끼니 굶어가며 산 책이에요. 농부로 치면 논밭 한가지라. 그런데 퇴직해서 집에 갖다 놓으면 마누라까지는 봐줘도 며느리는 갖다 내버리기 바빠요. 그 책들을 보내달라는 겁니다. 언어, 분야 가리지 않아요. 서고(書庫)로는 절이 최고지요. 누가 팔아먹도 못 하고 중들이 늘상 지키고 있으니 제일 안전하고요(웃음).”
-’나는 무소유와 정반대’라고도 하셨어요.
“무소유는 좋은 것인데 그게 포기 작전으로 가는 길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에요. 뭐라 할까.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명이 있는 한 같이 가야 할 것이 의욕이라. 호흡을 살아 있는데 의욕이 죽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죠. 그건 탐욕과는 다른 거예요.”
-최고령으로 드론도 배우셨다고요.
“내가 욕심이 대적(大賊·큰도둑)이라. 이제 고만 말아야지요(웃음).”
성파 스님이 10년에 걸쳐 도자로 제작한 16만대장경은 통도사 장경각에 모셔져 있다. 그 앞마당엔 스님이 옻칠 자개로 재현한 반구대 암각화가 물속에 전시돼 있다. 피카소도 울고 갈 작품이라고 하자, 스님이 껄껄 웃었다. “피카소도 별거 아이데!”
☞성파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으로, 193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22세에 경남 양산 통도사로 출가해 주지와 방장을 지내며 개산대제 개최, 성보박물관 건립 등 불보사찰의 격을 높였다. 도자, 민화에도 뛰어난 예술 승려로 16만 도자대장경과 이를 모신 장경각, 옻칠 자개로 구현해 수중 전시하는 반구대 암각화는 통도사의 명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