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26일) 서울 평창동에 대형 문화공간이 들어섰다. 서울예술고등학교 개교 70주년을 맞아 개관한 ‘서울아트센터’다. 180평 갤러리를 포함해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설 수 있는 무대, 1084석 객석과 최첨단 음향 시설을 갖춘 서울아트센터는 예술의전당, LG아트센터에 버금가는 강북권 명소가 될 전망이다.
이 건물이 서기까지의 사연이 극적이다. 2010년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한 이대봉(82) 참빛그룹 회장 이야기다. 그는 이 학교 성악과 1학년에 다니던 열여섯 살 아들을 학교폭력으로 잃었다.
◇열여섯 살 막내아들의 죽음
-2020년 착공한 서울아트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예고 교사와 학부모들의 숙원이었다던데요.
“원래는 정동에 있는 예원학교를 이곳으로 옮기고, 정동엔 외국인 빌라를 지어 거기서 나온 수익금을 학교 재정에 보태려 했지요. 그런데 학교에 공연장이 꼭 있으면 좋겠다는 교사, 학생들 소망이 간절해 사재를 털기로 했습니다.”
-부도 위기의 재단을 인수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예고는 1987년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막내 아들이 학폭으로 목숨을 잃은 학교인데요.
“다들 미쳤다고 했지요. 아들을 죽인 원수의 학교에 왜 돈을 투자하느냐고. 그런데 저는 내 아들의 꿈이 자라던 학교라 그냥 문 닫게 놔둘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죄 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 위한 일이라고 가족을 설득했습니다.”
-36년 전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까.
“뉴욕 출장 중인데 비서가 전화를 했어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막내 대웅이가 선배들한테 맞다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갔다고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지요. 그런데 이미 냉동실에 들어간 뒤였어요.”
-가해자 학생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셨다고요.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학교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했지요. 회사 직원들이 학교로 몰려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장 선생님이 도망갈 정도였죠. 그런데 막상 영안실에 평안하게 누워 있는 아이를 보니 눈물만 났어요. 내 죄와 업보가 많아 이렇게 된 건가 싶고. 복수를 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난동을 피우면 아버지가 저러니 아들이 벌을 받았다 할 거고요.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아들을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겁니다.”
-담당 검사는 선처할 수 없다고 했다면서요.
“검사 생활을 18년 넘게 했지만 자식을 때려 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부모는 없었다며 절대 안 된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직접 구명운동을 했습니다.”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3형제 중 막내였죠. 불도저처럼 물불 안 가리고 일하는 저를 늘 ‘대장’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밝은 아이였어요. 출장 때문에 성악 발표회를 못 가서 아이가 서운해하길래 원하는 앨범을 사다 주기로 약속했었죠.”
-어쩌다 학폭이 일어났나요.
“대웅이가 노래도 잘하고 인기도 많았어요. 성악 발표회도 성공적으로 끝내 찬사를 받았는데 이를 시샘한 선배들이 학교 뒷산으로 불러내 건방지다며 복부를 여러 차례 때렸다고 해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대들다가 또 맞고. 병원으로 너무 늦게 옮겨져서 그만.”
-어머니의 충격이 가장 컸을 것 같습니다.
“집사람은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갔어요. 그후로도 네 번 혼절하고 겨우겨우 살아났죠.”
-학교에 추모비를 세웠다고요.
“학생들이 돈을 거둬 음표 모양의 작은 비석을 세워줬어요. 장지에 갈 때도 버스 3대가 꽉 차도록 아이들이 함께 가줘서 큰 위로가 됐지요. 무덤 앞에 학교 교정에서 옮겨온 주목 두 그루를 심고, 추모음악회도 열어줬지요. 눈물바다가 됐어요.”
-이듬해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했지요?
“대웅이가 사사한 분이 김성길 서울대 교수인데, 아이가 평생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장학회를 제안하셨죠. 35년 동안 3만여 명의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풀려난 가해 학생은 서울대에 진학했다고요. 가끔 찾아옵니까?
“아니요.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 애를 보면 혹시라도 내가 무너질까봐서.”
◇사업도, 교육도 “현장에 답이 있다”
-대웅 군 사건 이후로 서울예고에는 학폭이 급감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먼저 받는 교육이 학폭 예방 교육이에요. 제 아들 추모비가 서 있으니 전교생이 그 사연을 다 알고요. 교목(校牧)에게도 부탁을 했어요. 아이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죄를 안 짓도록 가르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학교를 인수한 뒤 연습실부터 리모델링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예술을 잘 모르지만, 최고의 환경에서 아이들이 배우게 하고 싶었어요. 사업할 때 내 신조가 ‘현장에 답이 있다’여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민대의 공연장과 연습실을 직접 답사했지요. 연습실에 죄다 거울이 달려 있고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길래 우리도 똑같이 해보자고 했어요.”
-서울아트센터를 지을 때에도 현장을 다니셨겠군요.
“그럼요. 특히 역삼과 마곡에 들어선 LG아트센터에서 많이 보고 배웠지요. 남을 알아야 내가 따라갈 수 있고 더 좋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부산 영도에서 개교한 서울예고가 올해로 70주년입니다. 예원학교까지 포함하면 조성진 임윤찬 박세은 등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는데요. 그 비결이 뭘까요?
“대학 교수 이상으로 실력이 뛰어난 선생님들이 계시고,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일궈낸 전통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에 가장 많이 진학하는 학교로 매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90명 안팎의 학생들이 입학하지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꼭 당부합니다. 실력 이전에 훌륭한 인성을 가진 연주자가 돼라. 그리고 하루 1시간 꼭 운동을 해라. 연주든, 그림이든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없으니까요.”
◇열아홉, 고물상으로 시작해 일군 기업
-1975년 세운 동아항공화물을 모태로 참빛가스산업, 참빛동아산업 등 여러 계열사를 경영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고물상이었다지요.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집안 형편으로 그만두고 부산에 가서 신문 배달, 부두 하역 같은 일을 했어요. 그러다 서울로 왔는데 용두동에서 고물 장사 하는 이를 우연히 알게 돼 저도 시작하게 됐지요.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이 종잣돈이 됐어요.”
-한국 항공운수업 1세대인 거죠?
“그 무렵 미국에서 항만 파업이 일어나는 바람에 항공화물업이 엄청난 호황을 누렸어요. 부산시에서 항공화물업 허가를 받아 돈을 많이 벌었죠. 당시 경남 경북 지역 수출 물량이 우리나라 전체의 38%를 차지했어요.”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는 어떻게 이겨냈나요.
“저는 사업할 때 가급적 빚을 지지 않아요. 여유 자금이 없으면 무리한 투자를 안 하고요. 또,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끊어냅니다. 올초에도 그룹의 모태였던 항공화물업을 접었습니다.”
-호텔, 골프장 등 베트남으로도 진출했던데, 거기서도 장학사업을 한다고요.
“월남전 때 우리가 잘못한 게 많아서 소년소녀가장들을 돕고 있어요. 첫 장학금을 줄 때 만난 아홉살 아이가 잊혀지지 않아요.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고, 어머니는 전쟁 때 파편에 눈을 맞아 장애인이 되었대요. 산에서 딴 열매를 팔아 할머니와 생계를 이어가는데 장학금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펑펑 울어요. 그로부터 얼마 후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총서기가 저를 따로 불러서는 ‘당신은 베트남의 형제요 친구’라고 고마워하더군요(웃음).”
-독립운동가 자녀들, 독거노인들도 돕고 있지요?
“내가 가난한 청년기를 보내서 그런지, 열심히 장사해서 번 돈으로 어려운 분들 도와드릴 때가 가장 보람 있어요.”
◇지금도 아들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지만
-취업난, 주거난으로 절망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게으른 이에겐 가난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부지런한 이에겐 돈이 밀물처럼 밀려온다는 말을 나는 믿어요. 요사이 막상 장학금을 주려고 심사를 하다 보면 대상자가 없어요. 가난해서 학비를 못 댈 정도의 아이들도 적지만, 뭣보다 투지가 사라졌어요. 잠은 10시간 이상 자야 하고 일은 되도록 적게 하려 하고. 그런 게 많이 아쉬워요.”
-회장님이 일벌레라 직원들은 피곤하겠습니다.
“그럴 거예요(웃음). 대신 휴일에도 나와 일하는 직원들에겐 150%, 200% 확실히 보상을 해줍니다.”
-언제부터 가톨릭 신자였나요.
“부산에서 막노동하던 열아홉 살 때. 성당에 가면 옥수수떡을 주었거든요(웃음). 차츰 신앙심도 깊어졌지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추석 무렵이었을 거예요. 극기훈련 삼아 세 아들과 설악산에 갔지요. 종일 비가 와서 텐트 치고 비를 피해 가면서 8시간을 걸어 올라갔어요. 마침내 정상에 올라 집사람이 싸준 불고기와 반찬을 펼쳐 놓고 소주 한잔 곁들여 아이들과 만찬을 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지요. 그게 대웅이가 죽기 한 달 열흘 전 일이에요.”
-살아 있다면 52세인데,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는 많이 잦아들었나요.
“어느 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내 몸을 때리며 울어요. 아이를 생각하면 그날의 울분이 지금도 용솟음치죠. 그래도 저는 용서하는 마음이 복수하는 마음을 앞선다고 믿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거라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돈을 벌 수 있는 거라고. 대웅이도 천국에서 기뻐할 거예요.”
☞이대봉
194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진주농림고를 자퇴한 뒤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신문 배달, 부두 하역, 탄피 수집, 고물상을 하다 1975년 동아항공화물을 설립했다. 참빛가스산업 등 에너지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고, 베트남에 진출해 그랜드 프라자 하노이 호텔, 하노이 휘닉스 골프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 도산 위기의 서울예술학원을 인수해, 서울예고 개교 70주년인 올해 5월 서울아트센터를 평창동에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