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2000년대 초 베트남에 발령받은 외교관은 공산당 간부들이 끼고 다니는 100페이지 남짓 소책자의 정체를 알고 놀랐다.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 과정을 담은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가 IBRD 의뢰를 받아 작성했다. 너도나도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고 책을 구했는데 영어가 서툴러 답답해하고 있었다.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이 베트남어 번역본을 만들어 줘서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고등학교 교과서에 한국을 소개하는 독립 항목이 생긴다는 소식이 얼마 전 조선일보에 실렸다. 앞 부분이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GDP 기준 세계 10대 경제 국가에 속하고, G20과 OECD의 일원이 됐다. 한국 경제의 기적을 이룬 결정적 요인은 자본 집중이었다. 국가는 첨단 기술에 필요한 국내 자본의 집중을 허용했다. 1950년대부터 형성된 재벌은 소유주 가족의 단독 통제와 관리 아래 다양한 산업에 진출했다.” 교과서 필자 중 한 명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발전을 꿈꾸는 세계 각국의 모델이 되는 나라”라고 했다.

전 세계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취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선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D출판사 한국사 교과서에서 ‘6·25전쟁 이후 현대사’ 부분은 4·19 혁명, 유신에 대한 저항,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평화적 정권 교체, 확대되는 민주주의 등 여섯 장에 걸쳐 민주화 관련이 먼저 나온다. 그 뒤에 ‘경제성장과 사회 변화’가 딱 한 장으로 다뤄진다. 그나마도 ‘고도성장으로 재벌이 형성되다’ ‘노동자 삶이 나아지지 않다’ ‘농민들, 농촌을 떠나다’ 같은 부작용이 절반가량 차지한다. 다른 출판사도 구성이 비슷하다. 민주화 성과를 집중 홍보하면서 산업화는 마지못해 구색을 맞췄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민주화 세력에만 부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공로가 박정희를 비롯한 산업화 세력에 돌아가는 것이 못마땅하다. 친일(親日) 인명 사전을 만든 연구소가 제작한 동영상 ‘백년 전쟁’에서 그런 심리가 잘 나타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국과 일본의 꼭두각시로 묘사한다. 미국은 소련과 체제 경쟁을 위해,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지원했으며 박 전 대통령은 두 나라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해서 경제 기적을 일궜다는 환타지 소설이다. 그렇다면 지난 20년간 전 세계가 75조원이라는 전무후무한 원조를 쏟아붓고, 미국이 국가 건설 작업을 총력 지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처참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좌파는 100년 단위로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다. 시진핑은 건국 100주년을 맞는 2049년까지 미국을 추월한다는 중국몽을 제시했다. 그 꿈을 이루려는 중국의 분투 과정을 담은 책 제목이 ‘100년의 마라톤’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혁신위원장으로 지명했다가 9시간 만에 거둬들인 이래경씨의 직함은 ‘다른 백년’ 명예이사장이다. 그는 저서 ‘다른 백년을 꿈꾸자’ 속에 자신이 그리는 대변혁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 ‘다른 백년’이라는 표현 속에는 건국 75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잘못된 경로를 거쳐 왔다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천안함은 자폭’이고 ‘코로나는 미국산(産)’이라는 이씨는 도대체 어떤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문재인 정책과 이재명 대선 공약이 뒤범벅된 가운데 좀 더 황당한 내용이 가미돼 있다. 우리 복지 재정은 200조 남짓으로 GDP 10%인데, 이씨는 이를 3배가량인 30%로 늘리자고 했다. 그 재원은 상속, 증여 최고 세율 50%에서 80%로 인상, 복지 용도로 한정된 국가 화폐 발행 등으로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주 1표 주주 중심에서 1인 1표라는 가치 중시로”라는 이씨의 구호는 문 전 대통령의 경제관과 판박이고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시대는 저물고, 중국이 대국의 면모로 포효한다”는 국제 정세관은 두 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국장급 중국 대사의 훈시를 듣는 이재명 대표의 모습과 교차된다.

압도적 국회 의석으로 국정을 쥐락펴략하는 민주당이 이런 허무맹랑한 로드맵에 따라 ‘혁신’될 뻔했다. 지난 대선에서 0.74%p 차 승부가 엇갈렸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생체 실험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으스스해진다.

김창균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