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망한 지 한 세기도 더 지났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지금 세상에도 이씨 왕조의 전(前)근대성을 빼어 닮은 ‘변형된 조선’이 세 곳 존재한다.
첫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칭하는 ‘북조선’이다. 북한이 조선 왕조의 진정한 후계자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혈통 세습, 1인 숭배, 사상 통제, 민중 탄압, 신분 차별 등 북한 체제를 움직이는 전근대적 구성 원리는 조선 시대의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주체를 빙자한 ‘우리 민족끼리’는 바깥에 빗장을 걸어 잠갔던 19세기 ‘쇄국양이’와 동의어다.
그 서쪽, 시진핑의 중국은 역사의 진보를 거스르는 역주행 코스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진핑 영구 집권 체제의 완성과 비례해 독재와 반민주, 권위주의의 색채를 더해가고 있다. 개인 숭배가 만연해지고, 인권이 억압받고 있으며, 체제 비판 인사들이 행방불명되고, 의문사가 잇따르는 나라가 됐다. 절망한 중국 네티즌들은 자기 나라를 ‘서(西)조선’으로 부르며 자조한다고 한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 유사(類似) 왕조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한말 위안 스카이를 방불케 하는 주한 중국 대사의 폭주는 서조선화(化)되고 있는 중국의 전근대성을 드러내는 일화일 뿐이다.
21세기 첨단을 달리는 대한민국에도 조선의 후예들이 있다. 함재봉 전 아산정책연구원장, 철학자 임건순 같은 이들은 야권을 장악한 운동권 좌파가 ‘현대판 위정척사파’이자 ‘양복 입은 사대부’라고 규정한다.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 원리주의의 정신 세계를 오늘날 좌파 세력이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과학을 부정하는 이념 위주 관념론, 자기만 옳다는 도덕적 우월주의, 사물을 선악으로 가르는 이분법,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모는 당파성, 글로벌 세계에 눈 감는 폐쇄성 등 두 그룹의 집단 형질은 수백 년 간극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한 싱크로율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놀라운 공통점은 친중 사대의 DNA다. 베이징에 간 문재인 대통령은 ‘혼밥’ 굴욕을 당하면서도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로 치켜세웠다. 중국을 높이려 한국을 “작은 나라”로 낮추는 자기 비하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 정권의 첫 중국 대사 노영민은 시진핑 접견 후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 썼다. 조선조 송시열 등이 명(明) 황제를 향한 충절을 고백할 때 썼던 글귀였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중국을 ‘말[馬]’, 한국을 ‘말 궁둥이에 붙어가는 파리’에 비유한 일도 있다. 21세기의 상식으로는 이렇게까지 비굴할 수 있는 이들의 의식 구조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전략적 친중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좌파의 친중은 합리성을 넘은 맹목적 추종에 가깝다. 그 말 많은 운동권 좌파가 단 한 번이라도 중국에 싫은 소리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이 없다. 중국이 ‘대만 침공’을 협박해도, 홍콩 민주화 시위를 무력 진압해도, 소수 민족 인권을 유린해도, 심지어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속국” 발언이 전해져도 한 마디 항의도 없이 침묵했다. 중국의 경제 보복 앞에서도 한국 정부를 탓하고 일부 단체는 피해자 롯데로 몰려가 시위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에 대해선 약간의 꼬투리만 나오면 호통치며 ‘죽창가’ 운운한다. 성리학의 화이론(華夷論)처럼 일본을 ‘변방 오랑캐’쯤으로 여기기 때문일지 모른다.
주한 중국 대사가 야당 대표를 앉혀 놓고 일장 설교하는 광경은 사극(史劇) 속 한 장면과도 같았다. 중국 대사의 오만함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지만 더 기막힌 것은 이재명 대표의 저자세였다. 인내심과는 거리가 먼 독설가 스타일의 이 대표가 이날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15분에 걸친 설교를 경청했다. 일본 대사, 미국 대사였다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참담하다.
19세기 위정척사파는 바깥 세상의 현실을 부정했다. 서구 열강의 침탈 앞에서도 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21세기 좌파도 글로벌 질서의 흐름을 오독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의 주류 진영이 아니라 독재·권위주의를 향하는 중국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 팽창 욕구를 담은 ‘중국몽’에 동참하겠다는 말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시대를 거스르는 이들을 향해 소장파 중국 연구자 최창근(중국전략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후기(後期) 조선’ 사람들이라고 일갈했다. 한국(Korea)에 살면서도 ‘조선(Chosun) DNA’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 안에 ‘후기 조선’이 있다. 나라는 글로벌 첨단을 달리는데 거대 야당은 ‘양복 입은 사대부’ 세력에 지배당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끝없는 진영 갈등은 이 기이한 이중성에 기인한다. 좌파의 전근대성이 대한민국의 현대성과 충돌해 도저히 타협되지 않는 균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