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려스트=이철원

한 방송국의 짧은 인터뷰 시리즈에 출연하게 됐다. ‘좋은 어른을 수집합니다’라는 모토로 어른이란 무엇이냐, 우리 사회에는 어떤 어른이 필요하냐 등을 말해보자는 취지라고 했다. 이런 섭외를 받으면 그냥 그 순간의 분위기, 그날 컨디션에 따라 즉흥적으로 답하게 된다. 무지 바쁜 날 마감에 쫓기다 연락을 받으면 “죄송합니다.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하고 거절하고, 한가한 날 뭐 재미있을 거리 없나 두리번거릴 때 전화나 메시지가 오면 출연료가 얼마인지, 촬영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다 일정을 잡게 된다.

좋은 어른이라고 스스로를 내세울 처지는 못 된다. 그래도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빼고 어른이기는 하냐고 물어본다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건 안 되건 어쨌든 스스로를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여기느냐고 물어본다면,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이겠다. 쉰 가까운 나이에 어른이 뭔지 모르겠어요, 아직 헤매고 있어요, ‘어쩌다 어른’이 됐어요, 하는 게 더 부끄럽다. 받아본 인터뷰 질문지에는 읽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내용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는 것 같다’는 문장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군.

정작 촬영은 어수선하게 마쳤는데, 내 상태가 어수선해서 그랬다. 단편소설 마감을 며칠째 어긴 상태에서 안 풀리는 원고를 쓰느라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고 스튜디오에 갔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어른은 어때야 한다 어쩌고 잘도 떠들고 있구나 싶어서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내내 겸연쩍기 그지없었다. 미리 받아본 인터뷰 질문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하지 않았고, 질문지에 적힌 대로 인터뷰가 진행되지도 않았다.

그나마 ‘어른이란 무엇인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해서는 평소 생각하던 바가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어른이란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혜, 통찰, 역량, 아량이 있는 어른이 되면 좋겠지만 그 덕목들이 어른의 필수 조건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른도 실수한다. 어른도 어리석거나 감정적 결정을 내린다. 경륜이라는 게 점점 중요성을 잃는 시대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경제적 손실이건 인간관계 축소이건 자기가 선택한 일의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거기에 책임을 진다. 마감을 어기면 그게 자기 탓임을 인정하고 원고를 기다리는 편집자에게 연락해서 사과하고 수습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더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느냐.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반성이 시작될 테고, 그러면 차후에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성공에는 그와 별개로 운이 필요한 것 같다.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주변 상황도 있다. 운이든 운명이든 하여튼 마키아벨리가 ‘포르투나’라고 부른 그게 따라줘야 한다. 그러니 어른이 되는 것은 성공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다.

다만 어른이 되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책임지는 사람은 주인이 된다. 주인만이 책임을 지니까. ‘부모님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이었음을 고백한다. ‘부모님’이라는 단어 대신 그 자리에 ‘사회 구조’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영향력이나 사회 구조 문제를 부정하는 말이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나는 어른이라면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자기 삶의 주인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책 실패는 다 전 정권 탓’이라고 하는 정치인도 어른이 아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권력만 잡으면 앵무새처럼 그 말을 하니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과연 정답이 있기는 할까?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제각각인 조언이 넘친다. 오랫동안 수련했다는 종교인들의 답도 서로 다르다. 결국 그 수많은 답안 중 한두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은 책임으로 완성된다. 어떻게 살겠다고 선택한 사람, 그것이 실패로 이어지더라도 감수하기로 각오한 사람에게서는 의연함과 당당함이 묻어 나온다. 다른 선택지들을 버린 만큼 그는 더 자유롭고, 그래서 여유가 있는 만큼 더 친절하기도 할 것 같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다정할 수 없다. 불운과 실패까지 내 것이라고 달게 받아들이기로 하는 그 자세를 ‘운명에 대한 사랑(아모르 파티)’이라고 부르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