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5월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장인 그랜드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대통령실

1990년대 중반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한국 관련 이슈를 귀동냥하기 위해 국무부 정례 브리핑에 참석하곤 했다. 필자를 비롯한 외국 특파원들이 브리핑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국무부 대변인과 미국 주요 매체 기자들이 동시에 입장했다. 그들끼리 내밀한 정보를 주고받는 사전 미팅을 갖는 듯 했다. 공식 브리핑에선 암호 해독이 필요한 선문답이 오갔다.

1995년 4월 미국 오클라호마 연방 빌딩 폭탄 테러 현장을 취재하러 갔다. 현장엔 3단계의 통제선이 설치돼 있었다. 일반인들은 맨 바깥 통제선, 필자 같은 외국 특파원은 두 번째 통제선, 미국 매체 기자들은 세 번째 통제선에서 각각 멈춰서야 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 미 지상파 TV 매체들은 마지막 통제선 내부까지도 출입이 가능했다. 미국 사회도 영향력과 친밀도에 따라 엄격한 차별이 적용됐다. 1인 1표 민주주의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허상이었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주요 20국(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준비 과정에 관여했던 우리 측 관계자는 “국제사회가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속살을 들여다봤다”고 했다. “미국이 사전에 소집한 몇몇 핵심 국가가 미리 결론을 내려 놓더라. 국제회의는 거기서 정해진 대본에 따라 진행되는 연극일 뿐”이라고 했다.

내달 미국 대통령의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한국이 미국의 Top-tier(최상위) 동맹으로 격상됐다”고 했다. 미국의 친소(親疎) 관계 동심원의 맨 안쪽에 한국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는 미국이 1978년 중동 평화 협정을 비롯해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할 때 활용해온 무대다. 이곳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동북아 현안을 풀어나가는 핵심 파트너로 선정했다는 뜻이다.

김창균 논설주간

윤석열 대통령은 유럽 안보 동맹체인 나토 정상회의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참석했다. 이명박 대통령 때 G20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G7 확장 멤버가 되는 2차 도약이 가시권 내에서 어른거린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 합참본부는 1948년 2월 미국 안보를 위한 전략적 가치 면에서 한국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국을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이 그렇게 그려졌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일 강화 조약 48개 상대국에 한국은 끼지도 못했다.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2023년 한국의 외교적 위상은 역사적 반전이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미국이 설계하고 주도해온 질서에 중국과 러시아라는 현상 변경 세력이 도전하는 모양새다. 중·러 두 나라는 자신들이 힘깨나 쓰던 시절을 되살리려고 미국 헤게모니를 헝클어뜨리며 이웃에 대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북한 김정은 왕조를 끌어안고 그 뒷배를 봐주는 중·러의 환심을 얻어내려는 총력전이었다. 학교 폭력을 뿌리 뽑는답시고 일진들의 비위를 맞추는격이었다. ‘중국은 큰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는 낯 뜨거운 헌사까지 바쳤다. 그래서 돌아온 건 혼밥 8끼 푸대접이었다. 불량배 떠받들면 대놓고 똘마니 취급하는 법이다. 문 정부의 동맹 궤도 이탈을 바라본 미국 관계자들은 ‘제2의 애치슨 라인’을 검토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중심 체제에 대한 적극 협조로 노선을 틀었다. 한·미·일 3각 협력을 촉구해온 미국 구상에 발 맞추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대만 위협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며 미국을 지원했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중·러를 자극하는 “자해 외교를 했다”며 국민에게 겁 주고 있다. 진짜 나라 걱정을 해서가 아니다. 대통령 때문에 나라가 위험해진 것처럼 공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민주당 기대와 달리 중·러는 이렇다 할 보복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겁줘서 고분고분해질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괜히 미국 쪽에 더 가까이 갈지 모른다는 걱정도 했을 것이다. 반장과 단짝 맺으면 일진도 조심하는 게 세상 이치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했고,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는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양쪽에서 한국을 압박해 온다. 어느 편에 줄 설지 선택하는 것이 외교의 출발점이다. 세상 이치를 잘 모르는 어린 학생들도 반장과 일진 중 누구와 짝이 되는 게 현명한지 정도는 상식적으로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