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쯤 회사 동료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내 머리에서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소리쳤다. “우아, 흰머리다!” 바지 지퍼를 채우지 않았거나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낀 것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그날 처음 만난 남자의 얼굴도 이름도 진작 잊어버렸지만 창피함을 동반한 그날의 깨달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노화(老化)의 방주’를 타고 언제 다다를지 모르는 육지를 찾아 헤매는 게 인생이라더니.
머리가 반백(半白)이 돼버린 지금, 흰머리 몇 가닥에 얼굴이 벌게질 리는 없지만 여전히 노화가 자랑스럽진 않다. 나처럼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며 흰머리를 감추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얼굴에 보톡스나 필러 같은 이물질을 넣어 주름을 숨기려는 이들도 있다. 과학·의학·기술 업계에서는 더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특히 노화와 유전학 분야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대 교수가 저서 ‘노화의 종말’(2019)에서 “노화는 질병이고,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천명한 이후 항(抗)노화를 넘어 역(逆)노화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노화를 고쳐야 하는 질병으로 보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싱클레어 박사가 이끄는 연구 팀은 지난달 12일 세포의 노화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화학 혼합물을 발견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 팀은 세포 노화를 되돌리고 세포를 젊어지게 할 수 있는 분자들의 조합 수백만 가지를 선별했고, 이 중 일부 조합은 늙고 눈이 먼 쥐의 시력을 되찾고 뇌를 더 젊게 만들었다. 학계에서는 “연구 결과가 과장됐다”는 비판도 나오지만 싱클레어 교수는 “전신 회춘이 가능한 알약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젊은 피를 몸에 넣으면 회춘한다더라”는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도 최근에는 현실화가 가까워졌다. 듀크대 의대와 하버드대 의대 공동 연구 팀은 늙은 쥐에게 젊은 쥐의 피를 수혈해 3개월간 경과를 지켜봤더니 늙은 쥐의 신체 나이가 실제로 크게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달 27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에이징’에 발표했다. 연구 팀에 따르면, 늙은 쥐의 생명은 6~9% 연장됐을 뿐만 아니라 신체 나이 자체가 어려진 반면, 늙은 쥐의 피를 주입받은 젊은 쥐의 노화 속도는 빨라졌다. 당장 인간에게 적용하는 건 무리지만 역노화에 한발 더 다가간 연구 결과다.
알약 하나로 혹은 젊은이 피를 수혈해 노화의 방주에서 내릴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남은 생애를 가늠해 봤다. 지금의 퇴직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직장인은 60~65세에 퇴직을 할 것이다. 100세는 거뜬하고 120세까지도 살 수 있을 테니 태어나서 살아온 시간만큼 살날이 남는단 얘기다. 퇴직 후 제2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건강한 신체를 갖고서 그 시간은 무얼하며 보내야 하는 걸까. 만약 경제적 수입이 없다면 (얼마나 받을지도 모를) 연금만으로 그 세월을 버틸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끝에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 헤맨 길가메시왕, 진시황부터 노화 방지 스타트업에 큰돈을 투자한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샘 올트먼 오픈AI 창업자까지, 역노화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대에 가장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걸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단 박사들이 오래 사는 법을 연구하는 데 매달리는 동안 ‘어떻게’ 오래 살아야 할지를 연구하는 데 성공한 박사는 왜 찾아보기 어려운 걸까. 싱클레어 박사가 당장 회춘하는 알약을 내놓는대도 우리는 아직 노화의 방주에서 내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