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양천구 교사 폭행 피해 사건,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 유명 웹툰 작가의 특수교사 고소 등 일련의 학교 관련 뉴스가 보도되면서, 그동안 누적된 교사들의 울분이 폭발했다. 학부모의 민원에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교사들은 이제 학생들을 실질적으로 훈육할 수 없게 되었고, 무너져 가는 교실에서 무력하게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교권 추락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해지리라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내 나름대로 우등생이었는데도 체벌과 ‘기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한국 체벌 역사에서 거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사례다. 그 전에는 체벌을 넘어서 구타가 성행하는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2010년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이래로 체벌은 빠르게 줄었고, 현재는 그야말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쩌면 모두가 교실을 지배하던 폭력의 기풍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그토록 빠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약 10년 세월을 거쳐, 풍향이 반대로 기울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제는 체벌 부활을 공공연하게 외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에 어떻게 ‘악성 학부모 민원’에 당하지 않게 교사의 자율권과 노동권을 보호할 것인지, 체벌을 대체할 다른 규율 부과 수단은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학생인권조례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지만, 조례 개선 방안이나 교권과 이룰 균형 모색이 더 주류이고, 조례를 아예 폐지하자는 의견은 소수에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주장이 공허하다는 의견도 있다.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가 부딪치는 첨예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판단 준거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재 교실의 문제는 단순히 교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가 경험한 저류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책임과 의무의 언어 대신 점차 권리와 돌봄의 언어가 두드러지는 사회로 이행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한국 사회는 반공과 경제성장, 혹은 민주화라는 대의를 모든 구성원이 따라야 할 ‘의무’로 규정하고, 구성원의 권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의를 의하여 너의 의무를 다하라’는 윽박지름과 폭력에 지칠 대로 지친 한국인들은 자신에게도 보장받아 마땅한 ‘권리’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야말로 타는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식으로 말하자면 ‘막대 구부리기’나 다름없었다. 레닌은 한쪽으로 구부러진 막대를 곧게 만들려면 반대 방향으로 그만큼 강하게 구부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간 공산주의 실험 결과는 참혹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권리의 방향으로 막대를 구부린 결과, 직분, 의무, 인내, 감수와 같은 개념들은 빠르게 ‘옛 언어’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의무의 압제에 구성원이 질식한 사회만큼이나, 모두가 자기 권리만을 요구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 어디를 가나 공공 기관 종사자들이 ‘민원’이라는 이름의 권리 요구에 지쳐간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상징적 풍경일 것이다.
따라서 교권 논쟁이 단순히 ‘갑질 학부모’ 몇 명을 단죄하고 ‘교사의 권리’를 천명하는 데서 끝난다면,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에서 ‘교사의 권리’로 다시 막대가 구부러지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교사의 권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교사의 권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교실과 교실 밖의 사회에서 책임과 의무, 자제와 수용이라는 잠시 잊었던 가치를 다시 떠올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20년 전의 그 교실로 돌아갈 리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니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권리와 의무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지 사회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마 그것이 새로운 ‘교실 이데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