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도 반바지 입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몹시 더웠던 이달 초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옆에 있던 동료와 이야기했다. 땀에 젖어 들러붙은 바지가 찝찝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그 뒤로 문득문득 반바지를 생각하게 된다.
여름은 언제나 더웠지만 올해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미 항공우주국(NASA) 과학자는 내년 여름이 더 더울 거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앞으로 맞이할 여름 가운데 올여름이 제일 시원한 여름이라는 밈(우스개)이 떠돈다. 폭염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것은 괴로움보다도 두려움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이 간소해져만 가는 세태가 아쉽지만 이제는 남자들도 일터에서 반바지를 입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된 것이 아닐까.
DJ DOC가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라고 노래했던 게 1997년이었다. 노랫말은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으로 이어진다. 그때의 파격은 지금 현실이 됐다. 여름 교복으로 반바지를 입는 학교가 생겼고 청바지보다 양복 입은 회사원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가요계의 악동이라던 그들조차도 회사에서 반바지를 입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옷차림은 변해가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1997년 대기업 사무실 풍경을 찾아보면 남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양복을 입고 있다. 조끼까지 갖춰 입는 스리피스 슈트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대(大)캐주얼 시대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옷차림이다.
1937년 7월 조선일보에는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라는 수필이 실렸다. 탈모(脫毛)가 아니다. 어느 여름밤 동료 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장난이 과해져 서로 모자를 망가뜨린 끝에 탈모(脫帽)로 지낸다는 내용이다. 다소 황당한 줄거리의 이 글에 “삼십이 넘은 내가 탈모를 한다는 것부터 우습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때 모자는 성인 남성이 당연히 갖춰야 하는 예절이었다.
반바지 출근은 해외에서도 논란인지 미국 뉴욕타임스도 얼마 전 이 문제를 다뤘다. 독자 질문에 기자가 답하는 형식의 코너였다. “남자아이가 8세가 되기 전까지는 긴바지를 입지 않았던 영국 왕가 전통의 영향으로 반바지는 미숙함을 뜻하게 됐고, 반바지를 입으면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설명하면서 “반바지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반바지냐가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반바지 옹호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반바지가 금기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정하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단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헐렁한 정장, 등산복 비슷한 합성섬유 100% 기능성 티셔츠처럼 오늘의 사무실에서 자주 보는 남자들의 옷은 양복이라서, 무채색이라서 단정한 것인가.
얼룩무늬 구형 전투복을 입었던 군대 시절 단정함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삼선일치’였다. 군복 상·하의 봉제선과 벨트 끝이 일직선이 돼야 한다는 이 규정은 그야말로 금과옥조여서, 삼선일치를 포기할 수 없는 한국군은 전쟁이 나도 포복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는데 신형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빼 입게 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 군복은 그때보다 덜 단정한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일하는 젊은 건축가들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살짝 놀랐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그들이 유망주로 주목받은 것이 반바지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예시는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무실에서 반바지를 입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금기는 없다는 것을 그 자유분방한 옷차림이 보여주고 있었다.